"5.18 정신을 '바벨탑'에 담는다고요? 촌스러워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139] 세종문화회관과 63빌딩, 그리고 30여 년 후 한국의 '5.18 상징 타워'

등록 2018.07.02 16:09수정 2018.07.0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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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세종문화회관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려고 그렇게 크게 지은 거래요."

얼마 전 부모님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 가서 뮤지컬 공연을 보고 왔다는 한 아이가 으스대며 말했다. 부러워하는 친구들 앞에서 연신 세종문화회관이 어디 있는 건지 아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별천지라도 되는 양 세종문화회관이 서울의 문화 중심이라면서, 그곳에 가서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서울에 갔어도 간 게 아니란다.

그는 뮤지컬 공연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건물 이야기만 했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집채만 하다거나 내부 홀이 웬만한 경기장 크기라면서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가며 친구들 앞에서 자랑했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국회의사당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며, 그곳에서 직접 전해 들은 '웃픈' 역사 한 토막을 소개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무조건 북한 것보다 커야 한다고 설계자를 다그쳤다고 해요. 평양 대동강 변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이나 대극장의 규모를 넘어서야 한다는 지시를 했다는 거죠. 건물의 크기를 국력과 동일시한 셈인데, 북한도 이에 질세라 건물의 높이와 규모에 집착하며 남한과 밑도 끝도 없는 경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한겨레>의 기사에 따르면 세종문화회관의 설계자 엄덕문은 청와대의 무리한 요구에 "그건 평양의 특징일 뿐"이라고 거절하고, 전통 공간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애초에 그런 요구를 한 정부가 한마디로 '촌스럽다'고 했다. 다른 한 아이도 몇 해 전 가족과 함께 여의도 63빌딩에 가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면서 친구들 앞에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며 우리나라를 찾을 외국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전시용 건물'이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1985년 완공된 63빌딩은 2년여 뒤 싱가포르에 원 래플스 플레이스가 세워지기 전까지 아시아에서 최고층 건물로 인정받았다. 그즈음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개념이 랜드 마크인데, 이후 63빌딩은 서울, 나아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랜드 마크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63빌딩이 세워지자 북한은 300m가 넘는 류경 호텔 공사로 맞대응했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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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상징탑'(일명 '5.18 광주 빛의 타워')은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이 6.13 지방선거 때 내세운 공약들 중의 하나다. 관련 소식을 담은 기사 갈무리. ⓒ 기사 갈무리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했는데, 아직도 여기저기서 '촌티 경쟁'을 하는 것 같아요. 이곳 광주에도 높이가 무려 518m에 이르는 초대형 건물이 조만간 세워진다잖아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하겠다는 취지라는데, 제가 보기엔 '바벨탑' 같은 건물과 5.18 정신은 그다지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한 아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종문화회관과 63빌딩에 서려있는 '촌스러운' 역사가, 최근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핫한 이슈인 이른바 '5.18 상징 타워'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다. '5.18 상징 타워'(일명 '5.18 광주 빛의 타워')는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 중 하나로, 아이들도 대강의 쟁점을 알고 있다며 나름 큰 관심을 보였다.

찬반이 갈리긴 했지만, 반대가 훨씬 많았다. 아이들이 놀이공원을 즐겨 찾듯 쏠쏠한 관광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는 것에는 양쪽 모두 대체로 수긍했지만, 이를 통해 5.18 정신이 확산 계승될 거라는 점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침체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5.18이라는 이름을 활용한 것일 뿐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광주 곳곳에 5.18 상징물이 이렇게나 많은데

기실 지금도 광주엔 5.18을 상징하는 장소와 건물들이 많다. 옛 전남도청과 망월동 묘역 등 당시 역사의 현장이었던 곳은 5.18 사적지로 지정되어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시민수습위원회가 열렸던 한 천주교회는 5.18 기념성당으로 공식 명명되는 등 5.18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5.18이라는 숫자는 이미 광주와 '동의어'다.

시내 곳곳에 산재한 5.18 사적지를 잇는 시내버스의 노선 번호가 518번이다. 또, 제주의 올레 길을 벤치마킹한 '오월 길'이 만들어져 도심을 걷다보면 여기저기 안내 표지가 보인다. 숱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금남로의 일부 구간은 '5.18 민주로'가 됐고, 오늘날 광장 민주주의의 효시가 된 옛 전남도청 광장도 자연스럽게 '5.18 민주광장'으로 명명되었다.

2004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광주광역시청 건물에도 5.18이 스며들어 있다. 당시 무고한 시민들을 끌고 가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던 군사구역인 상무대가 인근 장성군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가 된 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언뜻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배 모양의 건물인데, 현재 광주광역시 의회가 서로 마주보고 인사하듯 나란히 입주해 있다.

의회가 자리한 왼쪽 건물은 5층이고, 의회와 행정동을 잇는 중앙 홀은 통층 형식으로 단층이며, 오른쪽 행정동은 18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의회와 중앙 홀, 행정동의 층수를 연결하면 5.18이 되는 셈이다. 도시의 중심 건물이자 상징이 시청일진대, 시청사 하나를 신축하는 데에도 5.18 정신을 담고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은 광주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인 광주 FC와 야구팀인 기아 타이거즈에 5번과 18번을 영구 결번으로 정해 5.18 정신을 기리자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그것이 얼토당토 않는 황당한 주장은 아니다. 경남 창원을 연고지로 하는 NC 다이노스는 4.16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기억한다는 취지에서 4번과 16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 사례가 있다.

현재 기아 타이거즈의 18번은 이미 영구 결번이다. '무등산 폭격기'라고 불렸던 선동열 현 국가대표 감독의 배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왜 18번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80년대 침묵을 강요당한 채 야구로 한을 달래야 했던 광주 시민들과 함께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참고로 그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 선수의 7번도 기아 타이거즈에선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숫자로 남았다.

아무튼 굳이 '5.18 상징 타워'를 세우지 않아도 광주엔 5.18 상징물이 차고도 넘친다. 외지인들이 5.18 정신을 배우기 위해 부러 그곳을 찾을 일도 없으려니와, 아이들 말마따나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 정신을 '바벨탑'에 구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외려 광주를 찾는 이들은 80년에서 시간이 멈춘 듯 흑백 필름 같은 5.18 사적지의 있는 그대로의 옛 모습에서 큰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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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기념비' 밟는 이낙연 총리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5월 18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 5.18 옛 묘역에 들어서면서 바닥에 묻힌 전두환 기념비를 밟고 있다. ⓒ 연합뉴스


진정으로 5.18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면

을씨년스러운 망월동 구 묘역과 항쟁 기간 동안 수많은 시신을 임시 안치했던 텅 빈 상무관은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온다고 한다. 옛 건물은 헐리고 없지만, 역사를 증거 하듯 맨 꼭대기 녹슨 안테나만 살아남은 옛 MBC터는 언론의 존재 이유를 성찰해보라며 오늘도 오롯하다. 마주한 도로변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은 녹두서점 옛 터에서도 당시 불의에 맞선 청년들의 신념과 기개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5.18 최후의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 건물이 고립된 섬처럼 남아있는 모습에 누구나 가슴 아파하는 것도 역사의 현장이 주는 대체 불가한 감동이다. 그 자리에 새뜻하게 들어선 아시아문화전당의 세련된 경관과 복합 문화 공간이라는 교육적 가치도, 콘크리트 벽에 총탄 자국이 또렷한 옛 전남도청 건물이 주는 교훈을 넘어서지 못한다. 헬기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된 전일빌딩이 비록 낡고 허름할지언정 끝까지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인 이유도 그래서다.

진정 5.18 정신을 확산 계승시키고자 한다면, '5.18 상징 타워'와 같은 하드웨어에 집착하지 말고, 곳곳에 산재한 사적지를 활용한 답사 프로그램 등 소프트웨어 발굴에 우선 힘써야 옳다. 주말이나 방학 때 5.18 사적지 투어 버스를 운영해보는 것도 좋고,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 정신을 공유하도록 타 지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것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겠다. 혹여 5.18을 팔아 돈 벌 궁리라면, 5.18 정신을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다.

"높이가 518m면 서울에 있는 556m의 롯데 타워 다음인데, 은근히 순위에도 신경 쓰는 것 같아요. 만약 완공된다면, 5.18 정신이 앞서기보다 국내 2위의 마천루라는 홍보 문구가 먼저 오르게 될 걸요. 우리나라 사람들 남녀노소 불문하고 '서열 놀이'를 무척 좋아하잖아요."

'5.18 상징타워' 건설을 강행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아이들의 합리적 의심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고등학생들의 바람은 다소 성길지언정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산을 외양 꾸미는 데 쓰지 말라는 것. 곧, 보여주기 식보다 시민들의 삶을 보듬는 데 써달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5.18 상징 타워' 논쟁이 연신 '촌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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