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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마니아들이 이야기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아쉬움 중 하나는, 바로 높은 연령층의 마니아들을 위한 작품이 드물다는 것. 물론 우리에게는 과거 대본소 시절의 추억이 있으며, 허영만의 만화도 있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보다 신선하고 깊은 것을 원하는 마니아들의 취향을 맞추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 중엔 극단적인 성인물도 있다. 하지만 그에 몰입하는 마니아층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물론 국내에서는 '오덕후'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뒷일이 남아있지만. 우리 비디오 시장에 에로영화가 있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도 일명 '야애니'라고 불리는 작품의 시장이 형성돼 마니아들의 구미를 자극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 웹하드 상에서는 '야동' 못지않게 불티나게 잘 팔리는 상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의 시선과는 달리 '야애니'가 모두 한심스런 불량 작품인 것만은 아니다. 그룹 '노 다웃(No doubt)'의 'Ex-girlfriend'란 뮤직비디오에서도 장면이 그대로 인용돼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작품, 우메츠 야스오미의 <카이트>를 보면, 금세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19금' 애니메이션이지만, 저돌적으로 자극만 추구하지 않는 영리한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이 추구할 수 있는 액션의 극한

▲ 우메츠 야스오미의 <카이트>
ⓒ 스튜디오 ARMS
<카이트>는 영화 <킬빌>의 '인용 리스트'에도 올라가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스토리 자체도 <킬 빌>에게 꽤 많은 영감을 선사한 것 같은데, <카이트>의 주인공 '사와'는 <킬 빌>의 '오렌 이시이(루시 루)'와 비슷한 캐릭터다(물론 현실은 우마 써먼의 캐릭터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부모님의 비극적인 죽음을 계기로 전문 킬러로 양성됐으며, 성적 착취와 폭력에 의해 메마르게 된 캐릭터.

'전문 킬러'라는 설정에서 뤽 베송의 영화 <니키타>나 브리지트 폰다 주연의 <니나> 등이 연상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연약한' 이미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그 중에서도 '소녀'라는 캐릭터가 거친 남성의 세계와 욕망의 제물이 된다는 것은 비극적이면서도 자극적이다.

<카이트>는 그런 세계에 걸맞은, 아니 그 세계를 뛰어넘는 액션의 묘미를 선사한다. 표현 수위가 비교적 자유롭다는 OVA(Original Video Animation, 판매용 비디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걸쳐 있기에 액션의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원색적인 피와 자극적인 섹스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골수 '오타쿠'들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이다.

OVA 애니메이션은 DVD가 일반적인 유행과 경향으로 자리 잡은 요즘 시대에서는, 단어 그 자체로 봤을 때는 옛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TV 시리즈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흥행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메츠 야스오미는 성인용 OVA 시장에서 강도 높은 폭력과 섹스 장면으로 어필해 왔다. <카이트>와 더불어 <메조 포르테> <로보트 카니발>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카이트>나 <메조 포르테>는 살인과 암살이 난무하는 뒷골목 범죄 세계를 묘사한다. 다만 <카이트>가 본질적이고 음울하며, 알 듯 모를 듯한 비극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메조 포르테>는 자극적인 오버가 넘친다. 하지만 두 작품의 틀과 스타일은 비슷하다. 폭력과 섹스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지만 폭력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섹스라는 요소는 정말 뜬금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카이트>는 어지간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는 훨씬 능가하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압권이다. 숨기지 않고 '19금' 애니메이션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싸구려'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막상 보면 싸구려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 <카이트>의 한 장면
ⓒ 스튜디오 ARMS
53분(2부) 동안 오타쿠들의 구미를 자극할만한 요소를 적절히 잘 버무려놓다가, 여운을 남기는 엔딩을 선택함으로써, 오타쿠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그 센스는 탁월하다. 대중문화 아이콘 존재를 확실히 과시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관객이나 마니아로 하여금 논쟁을 유발하는 방법일 것이다.

<카이트>는 비극 덩어리다. '뜬금없음'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필요성을 과시하는 정사 장면 역시 주인공 '사와'의 비극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질적으로는 소녀의 성(性)이 남성의 세계에서 어떻게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러니하다. 상당수의 일본 '야애니'는 소녀의 성을 매개로 남성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를 납치 살해한 M군 사건 역시 그런 애니메이션에 심취한 도착증 환자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카이트>는 시궁창에서 사랑에 빠진 두 남녀를 매개로, 무궁무진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권력과 청소년'의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며, 물론 이야기 그 자체로서도 상당한 매력을 안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엔딩을 상당히 모호하게 처리하면서 생긴 시너지 효과다.

겉으로 봤을 때는 캐릭터의 미래를 위한 당장의 이야기에 대한 논쟁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타락한 권력이 비극적인 두 남녀에게 어떤 식으로 끈질긴 잔혹함을 과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화려한 액션과 정사 장면도 그런 차원으로 해석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포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극단적 상상과 연출이 가능한 '애니메이션'

▲ <메조 포르테>
ⓒ 스튜디오 ARMS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비극이 범벅이 됐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카이트>는 두 남녀의 '몸부림'을 그려놓은 애니메이션이다. 몸부림이 격하고 처절해질수록, 그 끈적한 끈은 더욱 거칠게 달라붙는다. <카이트>가 슬퍼 보이는 이유, 결코 싸구려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거친 삶의 이면을 이야기하기 때문은 아닐지.

그렇듯 애니메이션은 보다 풍부하고 넓은 상상도 가능하고, 극단적인 상상과 연출도 가능하다. 그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묘사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비극적인 미래를 그릴 수도 있으며, 온갖 다양한 패러디도 모두 거침없이 그려낼 수 있다. 물론 독자적인 가상의 세계도 창조할 수 있다. 드넓은 상상의 영역, 그렇기에 미지의 영역인 곳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그 '적나라함'은 국내의 대다수 관객들에게까지 받아들여지기에는 무리한 부분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카이트>는 2001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의 상영불가 판정으로 인해 상영이 취소되는 해프닝을 겪었고, 국내에 출시된 DVD의 경우 정사 장면이 대폭 삭제돼 출시됐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 드넓은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OVA 애니메이션이라는 그 틀도, '오타쿠' 취향의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이 아니라면 여전히 낯선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설음에 대한 도전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도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애니메이션의 가능성 역시 낯설음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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