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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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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

관조운은 순식간에 벌어진 살극에 형수와 조카가 충격을 받았을까봐 그들 곁으로 갔다. 조카 섭월은 목숨을 건 살전을 직접 눈으로 보자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방안에 있던 이숙 기승모도 어느새 나와서 마당 나와 한켠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혁련지도 관조운 곁으로 다가왔다. 마당엔 무정도 동백웅이 옆구리의 상처를 손으로 감싸며 서있다. 무정도가 관조운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관소협, 나머지 유품을 내놓으시오."

관조운을 힐끗 거실 안을 보았다. 그곳에는 정운수좌가 아직도 꼼짝 않고 쓰러져 있다. 숨이 끊어져 있는 것 같았다. 관조운은 탑림에 가기 전 진인의 나머지 유품 퉁소와 문병을 정운수좌에게 맡겨놓았다. 탑림에 가서 그림과 부채를 가져오면 네 가지 유품이 모두 모여 진경의 소재가 파악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네 개의 시구(詩句)와 세 개의 그림이 모이면 가닥이 잡힐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그림과 부채는 강탈당했다. 정운수좌가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퉁소와 문병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있지 않소."
"은화사의 정보력을 우습게보지 마시오. 소협."
"이미 이곳을 침습한 자들에게 빼앗겼어요."

혁련지가 나서서 답했다.

"그렇다면 유품의 소재가 파악될 때까지 댁들 모두 은화사에 연행해야 겠소."

산전수전 다 겪은 동백웅이 혁련지의 말만 믿고 물러설 리는 만무했다. 동백웅은 채당주가 검은옷을 입은 자를 추격하여 물건을 되찾아 오리라 확신했다. 채당주의 무공을 현 무림에서 당할 자가 있을까. 정 꼽는다면 다섯 손가락 이내이지 싶다. 동창의 실질적 수장 노순광의 수족이 되기까지엔 그만큼의 무공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흥, 무슨 권한으로 은화사에서 우리를 연행한다는 거죠?"

혁련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겐 동창의 비첩이 있다. 이유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포박을 받아라. 대신 부인과 아이는 제외시켜 주겠다."

동백웅의 어투가 하대로 바뀌었다. 동창의 비첩과 금의위 비관은 조정의 권한이 미치는 곳이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그 명을 따라야 하는 걸, 이 남녀는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건가.   

"구린내 나는 환관들의 비첩 따위 가지고 우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요."

혁련지가 쏘아 붙였다.

"으흠, 말로 해선 안 되겠구먼, 본좌가 비록 약간의 부상은 입었다하나 너희 같은 어린애들 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동백웅이 허리에서 파풍도를 뽑았다. 스캉! 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관조운과 혁련지도 동시에 검을 뽑았다. 비록 부상을 당했다고는 하나 무정도를 각각 따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큰 강적이었다. 관조운은 혁련지와 사이를 벌리고 동백웅과 삼각으로 맞섰다. 뒤로 돌아가 앞뒤로 협공하고 싶었으나 동백웅이 틈을 주지 않았다. 관조운이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동백웅도 뒤로 물러서면서 여전히 세 명 사이의 각도를 유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요사채의 벽에 다다르게 된다. 동백웅이 벽에 등을 대게 되면 그는 전면만 방어하면 된다. 관조운과 혁련지의 합공이 시야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관조운이 먼저 선공을 했다. 촉영비사(燭影飛蛇)로 동백웅의 왼쪽 가슴을 찔러나갔다. 촉비사는 마치 뱀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촛불이 흔들려 상대의 시선을 흐트러뜨린다고 스승 모충연이 말했다. 관조운의 이 한 수가 적의 시선을 흩트릴 때 사매가 그 틈을 노릴 것이다 동백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관조운의 검을 파풍도로 쳐냈다. 채앵, 터엉, 날과 날이 부딪치고 면과 면이 서로 튕겨졌다. 그 틈에 혁련지는 아미파의 절기 청풍비화(靑風飛花)로 동백웅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한줄기 바람에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듯 변화가 무쌍한 공격이다.

그러나 동백웅은 뒤로 한발자국 훌쩍 뛰어 혁련지의 매서운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관조운이 혁려지를 힐끗 쳐다보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그들 공격의 길을 파악하고 있었다. 연속공격으로 정신 차릴 틈을 주지 말자는 무언의 교감이었다.

파압!

관조운이 소릴 지르며 요운검으로 짓치고 들어 갔다. 동시에 혁련지도 청학십삽식을 연속으로 전개하였다. 채쟁, 챙,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대장간 모루 두드리는 것처럼 울려퍼졌다. 그러나 관조운의 공격은 대부분 동백웅의 파풍도에 막혔고, 혁련지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동백웅이 방어를 하는 가운데 불쑥불쑥 내지르는 파풍도는 휙 휙 바람 소리를 내며 그들 사이의 공간을 갈랐다.

동백웅은 남녀와 일합을 교환한 후 이들의 무공이 별 거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옆구리의 상처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크게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서생차림 남자의 공격은 초식에 얽매여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고, 여자의 공격은 부드럽게 스며드나 위협적이지 못했다. 연속공격 시 이들의 합공을 막아내며 동백웅은 이제 자신이 공격의 고삐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거리가 벌어지자 관조운의 머릿속에 태을삼식이 떠올랐다. 초식이랄 수가 없는 휘두름이고 겨우 사흘 밖에 연습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믿음이 생겼다. 혁련지가 연제수형(燕濟水形)으로 제비가 물을 차듯 검날을 수평으로 만들며 상단을 베어 들어갈 때 관조운은 동백웅의 신형 전체에 마음 심 자를 새겨들어갔다. 그런데 상대가 혁련지의 검은 가볍게 튕겨내는데 비해 자신의 검은 막아내지 못했다. 한 번의 휘두름과 두 번의 찌름은 허공을 갈랐으나 마지막 찌름이 상대의 어깻죽지를 스친 것이다. 급소에서 비껴나가 살갗을 벤 정도에 그치긴 했지만  번번이 빗나갔던 공격이 처음으로 목표물에 닿았던 것이다.

동백웅은 섬뜩했다. 서생의 공격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수(手)였기 때문이다. 자운헌에서 볼 때와 판이하게 달랐다. 정상적인 검식이 아니었다. 검술은 휘(揮), 흔(掀), 삭(削), 자(刺), 타(打)의 격(擊)을 기본으로 하되 일정한 율(律)과 격(格)에 따라 투로(套路)를 형성해야 한다. 그래서 검법은 마구잡이 휘두름과 다르고 정신없이 찌르는 것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이 자가 한 공격은 투로의 격이 없는 비검(非劍)이었다. 아녀자의 칼질이나 백정의 도끼질도 이보다 세밀하다. 검법의 기초도 없이 내지른 것 같으나 이상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다만 검을 쥔 자의 내공이 깊지 못해 칼끝이 살아있진 못했다. 동백웅은 더 이상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방어만 하다가 한번 씩 위협을 가해 남녀의 기를 꺾은 다음 스스로 지치거나 포기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래야 이들을 쉽게 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생의 비검술(非劍術)을 맛본 후 자칫하면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살전(殺戰)으로 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동백웅은 게격세(揭擊勢)를 취했다. 나응착서(拿鷹捉鼠)를 시전하기 위해서였다. 게격세는 도병을 앞으로 잡고 도의 끝을 뒤로 한다. 얼핏 보면 물러서는 것 같지만 도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변화를 줄 수가 있어 고수들이 종종 취하는 기본세이다. 나응착서 초식은 까마득히 공중에 떠있는 매가 한 점 쥐를 잡기 위해 무서운 기세로 하강하여 정확하게 낚아채는 동작을 응용한 것이다. 동백웅의 가문절기이다.

관조운은 상대의 눈빛이 아까와 다른 것을 느꼈다. 태을삼식 심 자에 당한 후 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동백웅이 도의 끝을 뒤로 한 채 앞으로 일보 전진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뒤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동백웅이 무릎을 길게 빼 자세를 낮추더니 관조운의 무릎께로 도를 휘둘렀다. 관조운이 한발 물러서자 동백웅이 혁련지를 향해 등을 돌렸다. 관조운은 기회다 싶어, 태을삼식의 세 번째 을(乙)자를 동백웅의 등판에 새기고자 뛰어들었다. 그러나 복부에 묵직한 충격이 오며 관조운의 몸은 공중에 붕 떠 뒤로 날아갔다.

동백웅이 등을 보임과 동시에 뒷발차기로 관조운의 명문혈을 공격한 것이다. 다행히 명문보다 아래쪽 하복부에 맞아 치명상은 면했으나 관조운은 충격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이 아득했다. 그 순간 공중에 떠 있는 상대가 보였다. 상대가 도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에서 내려치려는 것이었다. 산이라도 쪼갤 듯한 기세였다. 관조운이 막는다 해도, 검이 부러지거나 튕겨져 나가 도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관조운이 왼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본능적으로 막기는 했지만 팔이 잘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팔만 잘리면 다행이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건 아닌지. 생각인지 느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심상(心象)이 스스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공중에 떠 있는 상대의 떨어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느렸다. 어쩌면 공중에 그냥 떠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시야가 가려졌다. 눈앞에 검은 휘장이 갑자기 드리워지더니 묵직한 무게감이 자신을 덮쳐눌렀다. 엉거주춤 일러나려던 관조운은 다시 벌렁 누웠다. 요운검이 곧추 세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검 스스로가 벌떡 일어서는 것 같았다. 곧이어 검신에 무언가 박히는 것 같았다. 단단한 찰흙 덩어리에 쇠꼬챙이가 쑤욱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어 손바닥에서 검이 스윽 빠져나갔다. 이 모든 게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흘렀다.  

조운이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온몸으로 자신의 상체를 덮어 누르고 있고, 그 뒤에 동백웅이 한쪽 무릎을 꺽은 반기마자세로 서있다. 그는 온몸을 가느다랗게 떨고 있다. 자세히 보니 복부에 요운검이 박혀 있다. 자신의 배에 박혀 있는 검의 날을 양손으로 잡은 채 눈을 허옇게 흡뜨고 있다. 곧이어 앞으로 푹 쓰러졌다. 요운검의 칼끝이 등판 위로 비죽 솟았다.

관조운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상체를 덮고 있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의 몸을 덮은 사람은 놀랍게도 기사숙이다. 동백웅이 관조운과 혁련지와 대결하면서 뒤를 내주지 않기 위해 조금씩 물러선 방향은 공교롭게도 기승모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칠팔 합의 손속을 교환할 때까지만 해도 기승모는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일인 양 무연히 바로보기만 했다. 그러다 관조운이 태을삼식으로 공격하자 기승모의 어깨가 움칠움칠하기 시작했다.

동백웅이 돌연 살기를 띠며 절기를 펼치려고 할 때 그는 언제든 뛰어들 수 있도록 몸을 잔뜩 웅크렸다. 동백웅의 나응착서는 허허실실의 초식였다. 관조운을 향해 일격을 취하기는 하되 삼분의 기세만 배분하여 공격하는 척 하다가 급히 방향을 틀어 혁련지 쪽으로 향한다. 등을 보이면 상대는 이때다 싶어 따라오게 된다. 그것이 노림수이다. 동백웅이 혁련지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뒷발을 내지르자 짓쳐들어오던 관조운이 복부에 일격을 맞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상대가 발에 걸리는 순간 다시 몸을 틀어 공중에서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 나응착서의 수순이다. 동백웅이 몸을 틀어 공중에 도약할 때 기승모가 몸을 던져 관조운의 상체를 덮었다. 동시에 자신의 왼손으로 관조운의 오른손목을 잡아 검을 세웠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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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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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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