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표지. (김태우, 창비)
창비
<폭격>의 저자가 이날을 운명의 날이라고 부른 것은 이게 초토화 폭격의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11월 한 달의 폭격 리스트를 보면 싹쓸이란 말이 적확할 것이다. 11월 4일 청진, 5일 강계, 8일 신의주에 이어 9일 삭주·북청·청진, 10일 청진· 의주, 12일 북청·만포진·선천, 13일 삭주·신의주·나남·초산·남시, 14일 신의주·나남, 15일 회령, 19일 무평리·구읍동·나남·관산·구성·별하리 표동, 20일 나남, 22일 무산, 23일 강계·삭주·구성, 24일 남시·장전하구·운산·신창·태천·구성·희천·강계 만포진, 25일 장전하구·만포진, 11월 26일 보급품 집적소, 27일 적 점령 도시, 28일 적 점령 도시, 29일 적 점령 도시, 30일 적 점령 도시...
폭격 다음 날에는 정찰기가 출동해 폭격지역을 사진으로 촬영해 결과를 평가했다. 도시별로 파괴율도 계산했다. 만포진 95%, 고인동 90%, 삭주 75%, 초산 85%, 신의주 60%, 강계75%, 희천 75%, 남시 90%, 의주 20%, 회령 90%... 당시 전선의 북쪽 곧 북한의 후방 지역은 전부 폭격으로 파괴된 것이다.
소이탄의 위력은 이미 일본 폭격에서 증명된 바가 있다. 일본에 투하된 소이탄은 목조건물을 불태우는 데 특화된 M-69였으나 북한에 투하된 M-76은 달랐다. M-76 소이탄은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로 만들어졌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강철을 녹이는 1980℃까지 온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에 차량 열차 철로 공장 등을 파괴하는 데 유용한 무기였다. 마그네슘은 폭발성 있는 가스를 형성시켜 인체에 유해한 연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화재 발생 후의 진화활동을 저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소이탄이 만들어낸 화염이 오래 지속되도록 별도의 조치들도 취했다. 화재를 진화하기 위해 나온 주민들을 향해 전폭기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기총소사로 퍼부은 것이다. 소이탄 투하 직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한 것도 같은 의도였다. 이 때문에 소이탄의 화염은 며칠이든 계속되곤 했다. 화재진화나 교량복구에는 민간인이 동원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기총소사와 시한폭탄... 잔인한 전쟁폭력일까, 영특한 무력일까.
11월의 압도적인 폭격에도 유엔군은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후퇴할수록 폭격지역도 남쪽으로 확대됐다. 12월 말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자 초토화 폭격은 38선 부근까지 확대됐다. 12월 28일 출격한 폭격기들은 파주시 금천, 황해도 서흥군 신막읍,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 등에 대량 집중폭격을 가했다.
1951년 1월 3일과 5일의 폭격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이틀 만에 완벽한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평양 이외에도 원산 함흥 흥남 등 북한의 대도시는 불붙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런 폭격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폭격의 위험에 노출된 이들에게 전쟁의 운명이란 말은 너무 안이하다는 느낌이다. 폭격은 하늘에서 내려온 무엇일까.
전폭기들은 폭격기 호위 임무 이외에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중폭격기가 목표로 삼지 않는 북한의 작은 마을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물론 적군이 점령하고 있고 아니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농촌지역의 작은 마을, 심지어 산간의 고립된 가옥들까지 모두 폭격의 대상이 됐다.
특기할 것은 폭격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대개 "남은 무기를 소진했다"였다. 전폭기든 폭격기든 임무를 수행한 다음 귀대하면서 지상의 전선을 남하하기 전에 남은 싣고온 무기를 소진해 눈에 보이는 임의의 마을을 임의로 폭격한 것이다. 기체의 중량을 감소시켜 기지까지 돌아가는 휘발유를 절약한 것일까, 아니면 충실하게 폭격을 연습한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긴장감은 넘치지만 자신은 절대로 죽거나 다칠 일이 없는, 컴퓨터 게임과 다를 바 없는 신나는 폭격놀이였을까.
폭격의 결과는 파괴와 살상만이 아니었다. 도시와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공습을 겪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공간과 지역에서 떠나야 했다. 하나는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가게 했다. 민간인은 가옥이 이미 파괴됐고 공습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어 허름하지만 토굴이라도 파야 했다. 토굴은 임시방편으로나마 은폐와 엄폐가 어느 정도는 가능한 생존공간이 되기도 했다. 중국군과 인민군은 전술적인 지하갱도를 판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하나는 살던 지역을 아예 떠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북한은 뒤숭숭한 전쟁통이긴 했어도 민간인의 피난이 물결을 이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폭격 이후에는 오로지 생존 그 자체를 위한 대량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각자의 정치적인 선택 이전에 오직 생존을 위한 피난이었다.
한 학자는, 전쟁 초기 서울 경기 지역에서 피난한 민간인들을 1차 피난으로, 광범위한 북한 지역에서 미공군의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한 것을 2차 피난으로 구분했다. 1차 피난은 정치적 피난의 성격이 강했지만, 2차는 당장의 폭격과 훗날의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피난으로 분석했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또는 폭격을 피해 남으로,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섞인 것이었을까. 내가 알아온 한국전쟁에서 남으로는 자유를 찾아서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적국의 민간인은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것인가
▲1950. 8. 19. 미 공군 B-29 폭격기가 청진의 공장지대를 맹렬히 폭격하고 있다.
NARA
폭격과 피해자 통계를 보면 한국전쟁이 민간인에게 얼마나 잔인한 전쟁이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본토에 16만 톤을, 일본군 전체를 대상으로는 총 5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런데 고작 5년 뒤에 신생국 북한에는 63.5만 톤을 투하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포함해 미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33만~90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미 공군의 화염 폭격으로 사망한 북한의 민간인은 99.5만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일본은 720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1.3%인 90여 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50년 당시 북한 전체 인구는 970만 명이었고 인구의 10% 넘는 인구가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몇 가지 스스로 물어본다. 김일성 정권이 전면전을 일으킨 것 자체가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범죄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모든 주민은 재판이든 경고든 아무런 절차나 배려도 없이 죽여야 하고, 그렇게 죽어도 마땅한 생명들이었나. 만일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적국이라고 규정하는 국가의 민간인들을 또 그렇게 죽일 것인가. 그렇게 죽인 만큼 우리 국민도, 아니 나 자신이 그렇게 죽는다고 해도 '전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퉁 치고 말 것인가.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범죄는 범죄다.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대, 악마의 무기 등이 그렇다. 적어도 야만이 아닌 문명이라고 말한다면 더욱 그렇다. 앞으로 어떤 전쟁이든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는 또는 우리 편이나 진영은, 민간인과 민간인들의 모든 것까지 깡그리 파괴하는 폭격을 작전명령으로 성안하고, 실행하고, 지지하고, 작전이 성공했다고 박수를 칠 것인가.
덧붙이는 이야기 |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한국전쟁 참고도서 리스트를 훑어보는데 '폭격'이란 두 글자 한 단어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온라인 책방에 주문을 했다. 다음 날 오전에 배송된 책을 집어 드는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두툼하고 묵직한 것에 흠칫 놀랐다. 서둘러 책을 꺼내는 바로 그 순간 충격이었다.
하얀 바탕에 짙은 검정과 어두운 빨강으로 그려진 폭격기가 땅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듯 배치되어 있었다. 우측 상단에는 큼직하고 새까만, 획이 두꺼운 고딕체의 '폭격'이란 두 글자가, 그야말로 땅에 박힌 불발탄처럼 두툼한 하드 커버 표지에 박혀 있었다. 비행기를 몰고 가서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단순해 보이는 행위에 대해 484쪽이나 되는 연구서를 냈다는 것 자체도 충격이었다. 책의 부제도 그랬다. 내가 아는 폭격이란 고작해야 피해자 증언의 집적 정도라고 넘겨짚었는데, 그게 아니라 폭탄을 퍼부은 미 공군의 폭격 기록 10만 쪽을 뒤지고 분해해서 추출해 낸 연구결과라니.
급한 마음에 목차부터 훑어보고 바로 머리말을 읽어갔다. 그러고는 폭격의 전쟁사에 집적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국가폭력 또는 군사력으로서의 공중폭격에 대한 인간들의 지독하고도 잔인하고 비열한 열망을 읽어가면서 충격은 계속됐다. 내게 축적된 충격이 남긴 것은 절망감 비슷한 것이었다. 상대방이 만만해 보이면 자기 힘으로 마구 제압하려 들지만, 자기를 압도하는 힘이 나타나면 그의 하수인이 되어 열렬히 숭배한다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이다. 특히나 권력에 가까운 인간일수록 이런 위험한 힘을 숭배하며 집착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누르곤 했다.
역사학자가 쓴 학술서나 교양서는 지루하더라도 나름 흥미롭게 읽는 것은 나의 일상이지만 책에 대한 소감을 충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금도 나는 이 책을 보면 폭격이란 제목이 충격으로 읽히곤 한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은 한 번에 완독하지 못하고 일 년 넘게 방치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는 폭격과 충격이라는 어휘가 맴돌고 있었다. 건드리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책이랄까. 이제 휴전협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짤막하게라도 정리하기로 마음 단단히 먹고 책을 다시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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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사정으로 12월까지 연재를 쉬어 갑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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