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팩션 29] 김태수, 백주원에게로 말 달리다

김갑수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 2008.03.10 11:48수정 2008.03.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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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항주 시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 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이 소설의 인물 민제호가 이 사무소의 책임자였다.

항주 시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 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이 소설의 인물 민제호가 이 사무소의 책임자였다. ⓒ 김갑수


그동안에 김태수는 민제호의 사무실에 두 차례 더 찾아가 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낌새로 보아 민제호는 백주원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백주원 얘기만 나오면 그는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김태수는 그 나름의 깊은 속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뜻밖에도 민제호의 동생 필호가 그의 객사에 찾아들었다. 필호는 황강을 옆에다 세워 놓은 채 술에 취해 있는 김태수를 발견했다. 호수의 안개 탓인지 김태수의 눈가에는 엷은 물기가 배어 있었다.


“객사에 갔더니 안 계셔서 구경삼아 나왔더니 말이 보이더군요.”
“미안하오. 오실 줄 알았으면 이렇게까지 마시지는 않았을 텐데.”
“형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더 이상 백주원을 찾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김태수는 술기운이 확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말을 내게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없습니다.”
“그럼 뭐요?”
“다만 그녀를 계속 공개적으로 찾는 것은 그녀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뿐입니다.”

김태수는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그들은 호수가 멀리 보이는 조용한 주막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저녁은 드셨소?”
필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쏘가리탕이 있는데 드시겠소?”
“좋습니다.”

김태수는 술을 시켜 필호에게 권했다. 필호는 기꺼이 잔을 받았다. 이유 없이 필호는 김태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나이를 알아보았다. 김태수가 5년이나 연상이었다. 필호는 자기의 확실한 형님뻘이니 말을 편하게 하셔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김태수는 다음 기회부터 그러겠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네 형제는 정체가 뭐요?
“…….”
“이제 더 이상 무역상이라고는 대답하지 마시오.”
“저희들은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중국에 왔습니다.”

말을 알아들은 김태수는 불현듯 가슴이 저렸다. 준수해 보이는 형제의 열정이 그를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군요. 더 이상 물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김 선생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백주원을 찾으러 왔다고는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왜 찾으시는지를 말하셔야 합니다.”
“워낙 설명할 밑두리가 없어 쑥스럽소. 사실 그녀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오.”
“그런 사람을 찾아 바다를 건너오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이유가 뭡니까?”
“그냥 무작정 한 번 보고 싶었소. 민형도 그 나이면 있겠지요. 보고 싶은 여자 말이오.”

필호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긴 한데 안 보아야 할 것 같은 여자가 있습니다.”
태수는 필호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필호는 황급히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그건 왜지요?”
“우린 영혼이 다릅니다.”

김태수는 필호의 말을 알아들었다. 자기로 치면 옛날 최영애 같은 여자일 터이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아내 최도애도 똑같은 부류였다. 이번에는 필호가 김태수에게 잔을 돌렸다. 호수 수면에 물안개가 오르고, 그 물안개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약속을 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오?”
“오늘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백주원을 말하지 마십시오.”
“약속한다면?”
“알려드리라고 했습니다.”
“형님께서요?”
“예.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 약속은 나에게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만나신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약속할 수 있소.”

필호는 다시 호수로 눈을 돌렸다. 김태수도 필호를 따라 호수를 바라보았다. 멀리 고깃배에서 불이 켜지고 있었다.

산동성까지는 천릿길이 넘었다. 김태수는 황강과 함께 달렸다. 상해까지는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그는 황강과 함께 배를 타고 운하를 통과하기도 했다. 강소성은 대부분이 평야지대였다. 구릉이 있다 해도 불과 수십 미터 높이 밖에는 되지 않았다.

황강은 양쪽으로 목화밭이 한없이 펼쳐진 평원을 기운차게 달렸다. 녀석은 오랜만의 장거리 주행에 묵혀 두었던 기운이 솟는 듯했다. 땅콩 밭을 지나면 밀밭이고 밀밭을 넘으면 또 목화밭이었다. 이따금씩 황해가 눈 옆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황강도 그랬지만 김태수 역시 지칠 줄을 몰랐다. 그의 빛바랜 갓과 은빛 모시 두루마기는 동중국 해안의 햇빛과 바람을 헤치며 유유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민필호는 두 곳을 알려주었다. 연대 여래사라는 절과 봉래 바닷가에 있는 채운암이라는 암자였다. 백주원은 둘 중 한 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두 곳 모두 도시는 아니었다. 한국으로 치면 면이나 읍 정도인 반 시골이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산동성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산동성의 자연은 김태수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한국과 비슷한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차츰 마음의 여유를 찾아갔다. 백주원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그는 지극히 편안하고 자족스러웠다.

사실 김태수가 달리고 있는 산동땅은 한국인들에게 그리 낯선 이역이 아니었다. 산동반도는 한국인과의 내왕이 일찍부터 이루어진 곳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인들이었다. 그 옛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폭풍과 풍랑 때문에 죽었겠는지는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용감한 사람은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었다. 특히 옛날의 무역은 용기 있는 자만이 독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인은 바다에서 사색할 시간을 얻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바다는 상인에게 열린 땅이었다. 토지는 인간을 속박하지만 바다는 인간을 선동하는 곳이었다. 김태수 역시 그 바다의 선동을 받았음일까?

연대의 여래사에 백주원은 없었다. 김태수는 곧장 봉래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땅히 들어갈 만한 주막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늘은 온통 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금방 쏟아지기나 할 듯이 별들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김태수는 황강의 고삐를 잡고 산비탈 나무 아래로 갔다. 그는 담요를 꺼내 바닥에 폈다. 그는 갓을 벗어 옆에 놓았다. 담요에 앉은 그는 배갈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는 천천히 마셨다. 그는 술병을 조심스럽게 갓 옆에 놓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단소였다. 이윽고 그의 단소 소리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석류 속 같은 별의 무더기들이 하늘에 꽉 차 있었다. 그는 다시 배갈을 집어 들어 아주 조금씩 오래 마셨다.

얼마 후 잠이 든 그를 황강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이슬이 노숙자의 하얀 버선을 적시고 있었다. 별빛이 그의 모시옷 위에서 수은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 밤 그 이역의 바닷가에서 하늘의 별들을 이불 삼아 이슬에 버선을 적시며 독주에 기운이 풀어진 김태수라는 조선 젊은이가 혼곤히 노숙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해 본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야심 찬 삶과 매혹적인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야심 찬 삶과 매혹적인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산동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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