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명인,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다

[인터뷰] 가야금 전파를 꿈꾸며 가수가 된 이예랑

등록 2008.12.10 18:27수정 2008.12.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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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야금 연주자 이예랑씨

가야금 연주자 이예랑씨 ⓒ 곽진성


올해 만 스물일곱, 가야금 연주인 이예랑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사와 석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2005년 제15회 김해 전국 가야금 대회에서 만 스 넷의 나이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중요무형문화재 23호 이수자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예랑에겐 가야금 명인(名人)이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하지만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008년 동생 이사랑과 함께 '가야랑'이라는 가야금 가수팀을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한 것이다. 가야금을 바이올린과 같은 세계의 유명 악기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야심차다. 11월 말, 서울 도곡동의 한 음반 녹음실에서 이예랑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여법관을 꿈꿨던 국악 집안의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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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진성

 - 소개를 부탁한다 .
"가야금 연주인 이예랑이다. 쌍둥이 동생 이사랑(27)과 함께 가야랑으로 활동하고 있다."

- 언제부터 가야금을 배웠나?
"정식으로 배우게 된 것은 고 1때부터다. 국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때는 소중함을 몰랐다. 당시에는 그저 공부 잘하는 게 최고인 줄만 알았다."(어머니는 옥계 변영숙, 이모는 정가 변진심, 거문고 변성금, 해금 변종혁 등 이예랑은 국악 집안에서 태어났다.)

- 어릴 적 꿈은 뭐였나?
"초·중학교때는 법관을 꿈꿨다. 아버지는 내가 가야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딸이 법관이 되길 바랐다. 할아버지가 전라북도 초임 판사를 지내셔 그 뜻을 이어받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 그렇다면 가야금 연주자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선생님이 가야금 대회에 나가면 학교를 며칠 빼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가야금 연습을 했다. 그렇게 1학년 때, 비전공자 신분으로 어머니와 함께 한밭 전국 가야금 대회에 나갔다."


- 전공도 안 하고 전국 대회에 출전했으면 엄청 떨었을 것 같다
"물론 그랬다. 대회날 겁이 나서 기권하려고 화장실에 숨었는데 어머니가 따라오시더니 누가 너한테 1등 나라고 했니? 하지만 기권은 안된다고 꾸중을 하셨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자신이 스승으로 나온 대회에서 기권을 하는 게 싫으셨던 것 같다.(웃음) 그렇게 대회에 참여했다."

- (대회 도중) 울면서 연주를 했다던데.
"연주를 하면서 곧잘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울었던 것은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머니한테 혼이 난 게 속상했고 감정이 복받쳐서 연주 도중 눈물이 흘렀다. 연주 후에 당시 대전 연정국악원 원장님이 관객석에서 보시고 대기실로 찾아 오셔서 감정이입으로 울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셨다. 그분은 지금도 어머니께 혼이 나서 울었던 걸 모르신다."


젊은 가야금 명인, 이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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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랑씨의 인사와 연주 ⓒ 이예랑


대회장에서 선보인 이예랑의 가야금 연주는 다른 연주자들과 달랐다. 내면의 재능 덕분에, 그리고 정식 가야금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야생마같이 겁 없는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가야금 선율에 빠져든 어린 연주자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결국 이예랑은 한밭 전국 가야금 대회에서 고등부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 그는 가야금을 전공하기로 마음먹는다. 법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꿈을 이뤘다. 3년 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국악과에 입학해 학사와 석사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 대학교 때 특별했던 일화가 있다면?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 대학가요제에 참가했었다. 가야금을 알리겠다는 생각에 대학가요제 오디션에 참여했고 마지막 열두 팀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여섯팀만 TV 방영이 되었다. MBC D공개홀에서 가녹화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마지막 오디션에서 쌍둥이 동생 사랑이와 연주 도중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만 눈물이 핑 돌면서 가사를 버벅대고 말았다. 모든 음악이 계이름으로 환산되어 들리는 버릇 때문에 가사를 평소에도 잘 버벅대긴 한다. 여섯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굉장히 소중한 추억이다."

대학 졸업 후, 이예랑은 대학원 재학 중 가야금 강연 활동과 제자 양성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2005년의 어느 날, 그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 제 15회 김해 가야금 대회에 출전 한 것이 바로 그 기회였다. 엉겁결에 대회에 출전한 대회에서 그는 최연소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그와 함께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 이수자가 된다.

- 2005년 제15회 김해 가야금경연대회는 어떤 계기로 참가하게 되었나?
"2005년 3월에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 뒤 내겐 인생무상이랄까? 슬럼프가 다가왔고 무엇인가 집중할 계기가 필요했다. 콩쿨에 출전하면 긴장 속에 집중할 수 있게 되므로 출전을 뒤늦게 결정했었다."

- 만 스물넷의 나이로 대통령상(대상)을 탄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사람의 목이 으뜸이라 하여 산조와 병창이라는 장르에서 병창에서 대상이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결승전 상대자는 연배가 나의 선생님이셨다. 12명의 심사위원으로 구성된 결과(병창6, 기악6)가 동점일 경우는 연장자에게 상을 준다. 그렇기에 연장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며 기권을 권유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고 연주를 했다. 덕분에 청중들로 가득 메워졌던 공연장이 정말 조용해졌다. 독주회마냥 연주했고 도중에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죽는 날까지 내게 잊지 못할 순간이다."

- 대통령상 수상과 함께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 이수자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스승님께서 중요 무형 문화재23호다. 대통령상 수상과 함께 스승님이 자신의 이름을 빛내줘서 고맙다 말씀하시며 날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 이수자로 선정하셨다."

가야금 명인,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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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진성

대통령상 수상과 함께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 이수자가 된 이예랑, 하지만 그의 꿈은 단지 젊은 가야금 명인이란 이름에서 머물지 않았다. 이예랑은 가야금 대중화를 위해 새로운 선택을 한다. 2008년에 동생 이예랑과 함께 가야금 가수 '가야랑'으로 데뷔한 것이다. 타이틀 곡 '수리수리마수리'를 들고 종횡무진 가요계를 누비는 그에게 가수로서의 삶에 대해 물었다.

- 가야랑 가수 데뷔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다. 가수를 한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하지만 평소에 젊은 세대의 숙제로서 우리 음악, 가야금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가야금 전공자로서 클래식만이 최고이고 대중음악은 그보다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가야금이 액자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즈음, 작곡가 정의송 선생님을 만났고 제의를 승낙하게 됐다."

- 어떻게 보면 가야금 명인이란 편한 길을 놔두고 스스로 어려운 길을 개척해 가는 느낌도 든다. 두렵지는 않은가?
"오히려 더 많은 대중 앞에 가야금과 함께 서게 되어 설레는 마음이다. 가야금 후배들을 위한 새로운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사명감까지 든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도 가야금을 내려놓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정면승부에서 두려워하지 않기도 다짐했다."

- 가수로 활동하며 행복한 때는?
"많은 분들이 미니홈피에 방문해 글들을 많이 남겼다. 가야랑으로 인해 국악이 우리나라의 중심 음악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확신했다는 글, 국악을 싫어했는데 이제부터 생각을 바꾸기도 했다는 글을 남긴 분들이 계시다. 그런 글을 볼 때마다 정말 행복하다."

- 앞과 비슷한 질문을 하나 더 던지겠다. 가수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는가?
"기억에 남는 인터뷰가 있다. 인터뷰차 신문사를 방문했을 때다. 가야금 조율을 하자 기자 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연주를 들려 드렸고 모두 가야금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면서 큰 박수를 보냈다. 그때 한 기자분께서 가야금으로 이미 자기 자리가 확실한데 왜 이 어려운 가수의 길에 들어왔냐고 대뜸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가 가야랑이 되지 않았다면 언제 이 가야금이 신문사 7층을 울릴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 가수란 분야가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 가야금 연주자로서의 삶과 가야금 전파자란 꿈을 지닌 가수로서의 삶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의 극과 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위기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하지만 두가지 일 모두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가야랑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그 두가지 작업의 교집합적인 음악을 전달하고 싶다."

- 가수활동에 바쁜 와중에도 가야금 앨범 '앓음다움'을 발매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앓음다움'은 어떤 가야금 음반인가?
"대한민국 최초로 한 연주인이 4가지 유파의 가야금 산조를 연주했다. 쿼터리즘의 승화로 현대인이 가장 집중하기에 좋은 15분 남짓의 네 곡이 수록되어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으로만 드러나는 멋이 아니라 내면의 고통과 번뇌, 앓음을 견딘 과정이라 생각한다. 가야금 연주하는데 있어서 연주인의 모든 앓음을 담은 아름다운 음반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 자신의 목표에 대해 말해달라
"어디에서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가야랑, 그리고 이예랑이 되고 싶다. 그래서 정말 가야금이란 악기가 사랑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가야금 연주자와 가수라는 이중생활을 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으로 건강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야랑의 꿈을 지켜봐주고 응원해달라. 수리수리마수리 사바하."

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이예랑 #가야금 #가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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