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방울 쓰지 않아도, 수도세는 정찰가 5000원이다.
김귀현
아버지처럼 날 잘 보듬어 주리라 믿었던 주인집 아저씨는 의외로 나에게 별 관심이 없으셨다. 주인님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 애타는 마음으로 주인님을 기다렸지만, 주인님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내 방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주인님은 수도세를 받기위해 찾아오신다. N분의 1이라며 한 달에 5000원씩 받아가신다. 수도세의 개념이 없는 나는 "왜 이리 비싸지?"하면서도 꼬박꼬박 냈다. 뭐 마땅히 반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자취생활 선배인 친구의 아픈 과거까지 생각났다.
"수도세가 좀 비싼 거 같아서 고지서를 보여달라고 하니까, '어른 말 못 믿는 버릇없는 놈'이라며 막 혼을 내시더라고. 그래서 그냥 냈지 뭐."군소리 없이 냈지만, 괜히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뭔가 복수(?)하고 싶었다. 유치한 방법이지만 물을 마구 썼다. '어차피 많이 써도 두 달에 1만원만 내면 되는데'하며, 물을 물쓰듯 썼다. 이내 어리석은 생각이라 깨닫고 다시 아껴 썼지만 말이다.
수도세 낼 때만 만나는 주인님, 그 모습은 의외로 냉랭했다. 계약 당시의 상냥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수도세, 5000원" 주인님의 말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건, 내가 평일엔 집에 잘 없으니 주말에 주로 찾아오신다는 것이고, 그 시간이 매우 이른 시간이란 것이다. 게다가 우리집은 초인종이 없어서, 문을 쾅쾅 두드려야 한다. 수도세를 내야할 즈음의 주말이면 "쿵쾅 쿵쾅"하는 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한 달에 한두 번 뵙는 주인님이 그 때만큼은 정말 미워진다. 아버지 삼는다느니 이런 거 다 취소다.
얼마 전엔 정말 참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굉장히 달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간밤에 케이블 TV에서 <용의주도 미스신>을 봤다. 그 잔상이 남았던지, 꿈에 '한예슬'이 나온 것이다. 만나서 밥도 먹고 데이트도 했다. 이어지는 결정적인 순간, 한예슬과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그 때 들리는 '산통 깨는' 소리, "쿵쾅 쿵쾅!", 아! 이번 달 수도세를 아직 안 냈구나.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문을 가열 차게 두드리시는 주인님부터, 수도세를 부과한 구청 수도과, 한국수자원공사까지.
결국 한예슬과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고, 난 허탈한 마음을 감추고 웃는 얼굴로 주인님을 맞이해야 했다. 한예슬의 눈 대신 주인님의 눈을 마주친 순간, 내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알량한 복수심이 또 불타올랐다. 다음 달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김없이 주인님은 문을 두드렸다. 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모드에 돌입했다. 집에 없는 척 했단 얘기다. 한참 문을 두드리시던 주인님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셨다. 물론 다음 번 방문 땐 죄송한 마음에 바로 튀어 나가 수도세를 드렸지만 말이다("그 땐 정말 죄송했어요 주인님").
비데 해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수도세 말고도 주인님의 방문 목적은 또 있다. 정확한 기간은 모르겠지만 가끔 '정화조 청소 비용'을 받으러 오신다. 뭐 쉬운 말로 풀어 쓰면 'X 푸는 비용'을 받아가신다는 말이다.
초보 자취생이라 '이런 것도 돈을 따로 내야 하나' 의심이 들었다. 근데 뭘 어쩌겠나. 내라면 내야지. 사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적게 싸지도 않았다. 막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푸는 비용은 1만원, 미련없이 냈다.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회사에 '룰루랄라 비데'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엔 여자 화장실에만 설치돼서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지만, 사장님의 거침없는 배려로 남자 화장실에도 이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