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가장 큰 선물, 여행

등록 2010.01.05 11:42수정 2010.01.0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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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뭔가 잘 풀릴 모양이다. 새해를 맞는 특이한 여행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특이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별게 아니고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는 이야기다. 아주 오래 전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사라졌었는데 이번 새해는 그것도 세 가정의 가족이 모두 같이 모였었고 어머니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된 셈이다.


이 여행의 시작은 어머니로부터였다. 어머니가 예감하셨는지는 모른다. 어떤 힘에 이끌려 그렇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년 12월 30일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야밤이었다. 어머니 표현으로는 "하늘이 두 쪼가리가 났나?" 할 정도로 엄청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고 곤히 잠든 시각이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밀치고 마루로 나가셨다. 막무가내로. 완강한 힘을 내 뿜으며.

a  눈 밭으로 쑥 캐러 가시는 어머니

눈 밭으로 쑥 캐러 가시는 어머니 ⓒ 전희식


보따리 두 개를 양 손에 끼고 마루 끝으로 성큼 나서면서 신발을 가져 오라고 큰 소리를 내셨다. 눈을 부비며 따라 나온 나는 탄성을 질렀다. 깜깜한 밤의 새하얀 눈. 온 천지가 하얗게 변했고 함박눈은 소리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 장관이 환상이긴 했으나 뒷집 '한동댁'이 쑥 뜯으러 오란다고 어서 가자는 어머니가 앉은 채로 장독간 쪽으로 마구 밀고 나가시는 현실은 참담했다.

당장 '한 발 앞서 상황을 주도하면서 방향틀기'라는 내 주특기가 발휘되었다.

"어머니 한동할매가 돌아가기 전에 우리 어서가요. 저쪽이죠? 빨리요."


내가 서두르면서 어머니를 눈 내리는 밖으로 이끌었다. 어머니도 아들의 부추김에 신이 나서 눈밭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정신을 수습하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과 깜깜한 밤 풍경은 결코 고향집 '한동댁'은 물론이요 '쑥'과 공존이 불가능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시던 어머니가 돌파구를 마련하셨다. 어머니의 기지는 따를 자가 없다.


a  긴급 퇴각을 하신 어머니 신발엔 눈이 묻어 있다.

긴급 퇴각을 하신 어머니 신발엔 눈이 묻어 있다. ⓒ 전희식

"희식아. 안 되것다. 한동댁 한테 가서 니가 그래라. 내일 가믄 안 되겠냐고."
"안 돼요. 오늘 가요. 나선 김에 어서 가요."
"이러다가 눈에 빠져 죽는다. 한동댁 한테 가봐아. 내일 간다고 그래봐아."
"눈 좀 왔다고 안 가면 어떡해요?  가요 어무이."

짓궂은 내 고집(?)에 어머니는 늘 나 보다 한 수 위시다.

"한동때액~~~~~"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을 제치고 직접 대화를 시도하셧다.

"내일 가믄 안 되것소? 내가 내일 갈게. 내일~~"

혼자 몇 번 소리치시던 어머니가 환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한동 할매가 지금은 바빠서 오늘은 못가니 내일 쑥 뜯으러 가자고 그러신다는 것이다.

"내일 가도 된다고? 알았소. 그라믄 그리 합시다."

한마디 더 산 쪽으로 고함을 치시고는 나더러 가자 가자, 집으로 가자 하신다. 방으로 돌아 온 나는 눈에 젖고 흙투성이가 된 어머니 옷을 벗겨 새 옷을 갈아 입혀 드리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바람을 쐬러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그게 새해맞이 여행을 하게 된 계기다.

a  저 멀리 천왕봉이 구름에 가려 있다. 길은 다져진 눈이 얼어 얼음길이었다.

저 멀리 천왕봉이 구름에 가려 있다. 길은 다져진 눈이 얼어 얼음길이었다. ⓒ 전희식

다음날 나는 바로 지리산으로 갔다. 자주 가는 정령치 계곡에 있는 물 수련원이다. 빙판길을 거북이걸음으로 갔는데 누가 묻지도 않았고 알릴 데도 없었지만 나 혼자 "엄니랑 함께 하는 새해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이왕지사 가는 길에 맛있는 음식을 사 먹어야 여행의 참 맛이 나는지라 지리산 가는 길목인 인월에서 어머니께 짜장 한 그릇 먹자고 했더니 어머니에게는 영원한 특식인 '자장'이 아닌 '짜장'을 그것도 간짜장을 같이 먹게 되었다.

지리산 수련원에 도착하여 욕조에 목욕을 시켜 드리고 동태국 저녁을 받으니 세상이 부러울 것이 없었다. 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리산의 달빛은 참 밝았다. 창가에서 달빛을 보며 가져 간 감을 깎아 먹었다. 

서울에서 형님과 여동생네 식구가 몽땅 내려온다는 전화가 왔다. 지리산으로 오라기에는 길이 너무 험해서 완주에 있는 집에서 함께 만나기로 했다. 어머니가 여간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다. 기분 좋은 여행까지 한 데다 자식들과 손자들이 온다니 부모 최고의 기쁨 아니겠는가.

a  오랜만에 여러 가족이 같이 만났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오랜만에 여러 가족이 같이 만났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 전희식


1월 3일 오후에 장계의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신 적이 없고 옷에 실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시건 귀 기울여주는 식구들 한 가운데서 날아 갈듯 한 기분으로 뭐든 잘 드시고 뭐든 잘 어울리셨다.

a  책상등을 당겨 놓으시고 바늘귀를 꿰시는 어머니

책상등을 당겨 놓으시고 바늘귀를 꿰시는 어머니 ⓒ 전희식


집에 와서도 계속되는 폭설 속에 나를 눈 치우고 물 길어 오는 일에 전념 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바느질거리를 찾아 옷을 꿰매시고 마늘 안 깐 것 있는지 달래서 마늘도 까고 방 청소도 하신다. 여행이 주는 삶의 전환효과는 젊은이나 늙은이나 마찬가지다.
#새해 #가족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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