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장소 주변에 마련된 추모비이 추모비를 설치하기 위해 힘든 투쟁을 감당해야 했다.
안호덕
안동병원에서 응급처지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경북대병원으로 옮겨 이틀 동안의 긴 사투를 벌인 영균이는 끝내 일어나질 못했다. 5월 2일 저녁 8시 13분 운명. 병원 공중전화로 학교(안동대)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죽었다. 영균이가 방금 전 죽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음소리만 오가고, 나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주저앉고 말았다. 후배들 때문에,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참아온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울고 있을 여유조차 허락지 않았다. 시신 탈취를 위해 백골단이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기자들 속에서 돌았다. 가족들은 다음 날 화장으로 가족장을 치르겠노라 발표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을 에워싼 가운데 100여 명의 학생들이 영안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뜨거운 불길에 죽어간 사람을 어떻게 다시 화장하냐고, 울면서 절규했다.
그러나 유가족은 끝내 국민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육신은 화장장을 향했고 영혼은 학교로 돌아와 5월 15일 학교 뒷산에 묻혔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꾼다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안동 시내에서 6월 10일 6·10항쟁기념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죽어가는 영균이의 병상을 지켰던 친구가 안기부로 연행됐다. 20여 일 동안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하며 그는 '분신 배후'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군에 복무하던 사람, 휴학생 등이 줄줄이 기무사, 안기부로 연행됐고, 당국은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지인의 회상은 아직도 섬뜩하다.
"야 임마. 이젠 털어놔. 너도 할 만큼 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오늘부터 여기서 밤새는 거야. 야 이 새끼야! 고집으로 될 일이 따로 있지!" 집요하게 분신 배후에 대해 물고늘어진다. "미련한 새끼야. 앞으로 더 견뎌낼 것 같아? 계속 잠을 자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넌 잠의 맛을 알기 때문에 이젠 이틀도 못 견뎌. 알겠어? 이 새끼야!"회유. 잡혔을 때보다는 긴장이 많이 느슨해졌다. 별 진척이 없자 "네가 영균이에 대해 그렇게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반미애학(반미애국학생회)을 터뜨릴 수밖에 없어. 이 멍청한 자식아. 지금 벌써 군 기무사, 군경, 안동경찰서 합동으로 연행과 조사를 착수했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선배라는 놈이 후배들 징역살이시켜서 되겠어?"- <김영균 열사 10주기 추모자료집> 중에서잡혀가지는 않았으나 졸지에 수배자가 된 세 명은 교수님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를 탈출했다. 후배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7시 뉴스에서 나를 포함한 수배자 이름이 나오고 27명 규모의 조직사건이 발표됐다. 이후 분신 배후 혐의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옮겨가 버렸지만 수배자가 된 많은 사람들의 기나긴 수배생활은 김영삼 정부 출범 전까지 계속됐다. 몇 년의 수배생활.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