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속물 근성, 어떻게 해야 하나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20] <거리 1>

등록 2013.04.10 11:28수정 2013.04.1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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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거리에 나와 보니
나의 눈을 흡수하는 모든 물건
그 중에도 빈 사무실에 놓인 무심한
집물 이것저것

누가 찾아오지나 않을까 망설이면서
앉아 있는 마음
여기는 도회의 중심지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태연하다
―일은 나를 부르는 듯이
내가 일 위에 앉아 있는 듯이
그러나 필경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일을 끌고 가는 것은 나다


헌 옷과 낡은 구두가 그리 모양수통하지 않다 느끼면서
나는 옛날에 죽은 친구를
잠시 생각한다

벽 위에 걸어놓은 지도가
한없이 푸르다
이 푸른 바다와 산과 들 위에
화려한 태양이 날개를 펴고 걸어가는 것이다

구름도 필요 없고
항구가 없어도 아쉽지 않은
내가 바로 바라다보는
저 허연 석회 천정―
저것도
꿈이 아닌 꿈을 가리키는
내일의 지도다

쇠라여
너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켰지만
나는
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가운 가옥과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
커다란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고마한 물방울로
그려보려 하는데
차라리 어떠할까
―이것은 구차한 선비의 보잘것없는 일일 것인가
(1955. 03. 10)

이 시는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와 보니"(1연 1행)로 시작합니다. 화자에게 찾아온 모종의 '변화'가 시상의 출발인 셈이지요. 그 변화는 '밀실'에서 '광장'으로의 이동입니다. 공간 배경인 '거리'를 '광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광장으로서의 '거리'에 선 화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에 있을까요. 그곳은 썰렁한 사무실입니다. "도회의 중심지"(2연 3행)에 있는, "빈 사무실에 놓인 / 무심한 집물"(1연 4, 5행)로 특징지을 수 있는 곳 말이지요. 벽에는 "한없이 푸"(4연 2행)른 '지도'(4연 1행)도 걸려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곳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이 '거리'의 빈 사무실에 '태연하'(2연 5행)게 앉아 머릿속으로는 온통 '일'을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일은 나를 부르는 듯이 / 내가 일 우에 앉아 있는 듯이"(2연 6, 7행)처럼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지요. 하지만 화자는 곧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필경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 / 일을 끌고 가는 것은 나다"(2연 8, 9행) 하고 말이지요.


이제 화자의 시선과 생각은 벽에 걸린 푸른 '지도'를 거쳐 "허연 석회천정"(5연 4행)으로 옮아갑니다. 그리고 그 '석회천정'은 "꿈이 아닌 꿈을 가리키는 / 내일의 지도"(5연 6, 7행)가 되지요. 여기서 지도는 방향을 설정하고 목표 지점을 탐색하는데 기준이 되는 도구입니다. 대체 화자는 그 지도로 무얼 하려는 걸까요.

시의 마지막 연을 봅시다. 난데없이 점묘법의 창시자인 조르쥬 쇠라(Georges Seurat, 1859~1981)가 등장합니다. 그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6연 2행)킨 프랑스 화가입니다. 그 쇠라와 달리 화자 '나'는 "이 따가운 가옥과 /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 / 커다란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 조고마한 물방울로 / 그려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이것은 구차한 선비의 보잘 것 없는 일일 것인가"라는 반어 의문문으로 전체 시상을 끝맺고 있지요.

화자는 지금 쇠라의 '점'에 견주어 '물방울'을 그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물방울'은 화자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이 합쳐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의 모든 것을 껴안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지 않을런지요. 화자가 마지막에 그 '물방울' 그리는 일을 선비로서 해야 할 일(반어 의문문에 따른 해석입니다)이라며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 앞(<도취의 피안> 부분 참조)에서도 살핀 것처럼, 수영은 이 시가 쓰이기 석 달쯤 전인 1954년 12월 초의 어느 날 일기에 한 여의사와의 혼담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이날 일기에 잠깐이나마 돈 많은 여자를 탐한 자신의 행태를 "값싼 광대의 근성"으로 비판하면서 일기 끝에 "깨끗한 선비로서의 높은 정신을 지키자"고 적어 놓습니다. 이 시에서 그가 어지러운 세상에 휩쓸리는 대신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의 '물방울'로 끌어안으며 극복하자고 다짐하는 배경도 같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지 않을런지요.

전후의 피폐함 속에서 자신만의 밀실에 갇혀 있던 수영에게 이 세상의 유혹은 참기 힘든 것이었을 겁니다. 그즈음 그에게는 실제적인 생활의 방편이라야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게 되는 외국 잡지 번역일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바란 건 선비의 고결한 지조였지만 저열한 현실은 그를 거리의 장사꾼으로 만들고자 했지요.

하지만 수영은 그 현실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1955년 2월 17일 일기를 한번 보시지요.

일류 정치가의 딸이 장사를 한다. 영화배우 같이 생긴 젊은놈 하나를 끼고 다니며 사십만 환짜리를 사서 그 자리에서 오십만 환을 받고 팔았다니 하며,
"삼십 분 동안에 십만 환 벌이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고 웃어보이는 혜순의 말.
새로 나온 월간잡지를 모처럼 갖다주었더니,
"아유 참 고맙습니다."
하고 불령(不逞)한 표정(!)으로 감격도 아닌 감격에 찬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로 선생.
그들이 나쁜지, 내가 나쁜지 모르겠다. 혹은 그들의 환경이 할 수 없이 그러한 구정물을 그들에게 강요하는지. 혹은 그르다 옳다 말을 하지 않고 보고 있어야 할 것을 이렇게 나만 쓸데없는 걱정을 일삼고 있는지.
현상이다. 하나의 현상이다. 현상이라고 보고 있으면 될 일이다. (<김수영 전집 - 산문>, 330~331쪽)

위 일기를 보면 수영은 '혜순'이라는 인물과 '로 선생'의 속물 근성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그녀들의 '구정물'을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들의 행태에 대해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저 지켜보아야 하는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며 애써 자위하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런 태도를 "쓸데없는 걱정"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일기에 나오는 '로 선생'은 본명이 '노봉식'이라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수영이 한국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거제도 수용소의 야전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여자였습니다. <김수영 평전>에 따르면, 그녀는 사고로 실명 상태에 있던 건축기사 남편을 대신해 간호사와 양호 교사, 회사 경리, 백화점 점원 등의 온갖 일을 전전하면서 생활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평전>의 저자인 최하림은 수영이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 그녀가 수영에게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어 주었으며, 전후에도 미묘한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55년 초에 아내 현경과 재결합한 이후에도 수영은 유부녀였던 '미스 노'와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합니다.

심지어 수영은 여동생인 수명에게 심부름을 시켜 미스 노와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수영에게 미스 노는 "손 한 번 안 잡아본" 여자, 그 앞에 서면 "입에서 말도 잘 안 나"오는 여자였습니다. 세속주의와 속물주의를 경멸한 수영이 위의 일기에서 그녀가 살아가는 환경의 '구정물'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좀더 신랄하게 꼬집지 않은 이유가 이런 데 있지 않았을까요.

그 자신이 되었든 미스 노가 되었든, 이 시기에 수영이 현실을 좀더 냉철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위의 일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환경의 '구정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현상'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이 시에서 화자가 이 세상의 모든 어지러운 것을 품고 있는 '물방울'을 그림으로써 꿋꿋하게 맞서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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