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를 앞세운 정보기관의 '탈선'...국정원은 민주주의를 납치했다

[取중眞담] 국정원 '대화록' 공개 사태를 보며 영화 <아르고>를 떠올렸다

등록 2013.07.10 11:02수정 2013.07.1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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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달 25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공개한 것에 대한 적법성 여부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이고 있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달 25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공개한 것에 대한 적법성 여부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지만 역사적인 공작을 성공시킨 공작원은 이름 없는 별이 된다."
"성공한 공작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실패한 공작만이 알려질 뿐이다."

정보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이 격언들은 정보요원의 숙명을 잘 보여줍니다. 국가이익을 위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어야 하는 정보활동의 특성상 정보기관의 속성은 폐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드러내 놓고 하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국익이 걸려 있는 일에는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것이 정보기관이 존재하는 이유일 겁니다.

사실 정보요원의 일이란 '제임스 본드'의 화려한 활약상과는 거리가 한참 먼 고단하고 힘든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국가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버텨내기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엄청난 자기 확신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은밀하게 수집하여 객관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예측하면서도, 세속적인 명예보다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남이 알아주지 않는 보람을 느끼는 것, 이것이 정보기관과 정보요원의 제일 덕목이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흔히들 "정보요원은 눈, 코, 귀는 기형적으로 발달시켜야 하지만, 입은 흔적기관처럼 퇴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설명하지 않고'(never explain), '사과하지 않고'(never apologize), '변명하지 않는다'(never excuse)는 이른바 '3불(不)원칙' 또한 비밀유지를 생명으로 삼기에 자기주장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정보기관의 특성에서 나온 원칙일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모토는 "익명에의 정열"(Passion for Anonymity)이고, 5·16 쿠데타 이후 김종필씨가 미 CIA를 본 따 설립한 중앙정보부의 부훈도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국가정보원의 원훈으로 쓰이고 있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국익을 팔아먹은 쿠데타', '국기문란 행위'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국정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지켜보면 정보기관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09년 9월, 원세훈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시민단체 사찰 행태를 지적했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지난 1월에는 불법 선거운동 의혹 등과 관련해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국정원을 비판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역시 명예훼손으로 국정원에 의해 고소당했습니다. 지난 달 24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강행했던 남재준 국정원장이 공개의 이유로 내세웠던 명분도 바로 '국정원의 명예'였습니다.


명예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국가정보기관이 내세우는 명예는 어쩐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낯설고 어색합니다.

"한국의 최근 논쟁에서는 정보기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7월 7일<워싱턴포스트>
"한국에서는 정보기관이 누설자(leaker)다." - 6월 25일<월스트리트저널>

최근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바라보는 외국 언론들의 평가입니다. 외신의 대체적인 시각은 보통 정보기관은 비밀을 폭로하기보다는 지키는데 힘을 쓰는데 반해 국정원의 경우는 정반대의 행동을 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분쟁을 유발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명예를 내세우면서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남재준 원장의 국정원에 과연 국익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 있었는지 참담할 뿐입니다. 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이 한 발언들이 국내 정쟁의 볼모가 돼버린다면, 과연 어느 나라의 정상이 박근혜 대통령과 속내를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또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재발될 때마다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록을 공개되어야 하는 걸까요?

그래서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를 두고 '국익을 팔아먹은 쿠데타', '국기문란 행위', '민주주의를 납치한 것'이란 지적들이 나오는 것일 겁니다.

국정원 명예, 스스로 내세운다고 지켜지지 않는다

중고생 시국선언 "민주주의 무너지는 것 방관할 수 없다"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지난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는 가운데, 시국선언을 준비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중고생 시국선언 "민주주의 무너지는 것 방관할 수 없다"'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지난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는 가운데, 시국선언을 준비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입장을 밝히고 있다.권우성

이번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 사태를 보면서 저는 지난해 개봉했던 미국 영화 <아르고(Argo)>를 떠올렸습니다. 이 영화는 1979년 이란 주재 미 대사관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점거되었을 때, 캐나다 대사관으로 피신했던 6명의 대사관 직원들을 CIA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구출해 낸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CIA요원 '토니 멘데스'는 기밀작전을 성공시킨 공을 인정받아, 아무도 모르게 상을 받지만 그마저도 다시 회수를 당합니다. 절대로 세상에 알려져선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포상 사실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멘데스 요원이 조용히 내뱉은 한 마디는 "박수를 받길 바랐다면 서커스단에 들어갔어야지"라는 것이었죠. 어쩐지 쓸쓸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익명으로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정보요원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말이었습니다.

국정원의 진정한 명예란 스스로 내세운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음지에서 어려운 일을 해낸다는 국민의 신뢰가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지켜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상회담 대화록 #국가정보원 #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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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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