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맞은 개척교회 목사, 세 자녀와 독일로 떠나다

[중년 부부 유럽 여행기 3] 생존을 위해 떠난 한국인 이주민이 찾은 새로운 기회

등록 2017.03.14 15:37수정 2017.03.1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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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중년의 부부가 유럽 다녀온 여행 이야기입니다. 독일, 이태리, 프랑스를 두 달 동안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버스로 자유롭게 다녔는데요. 맛과  명소를 탐방하는 관광과는 조금 다른 여행 얘기를 담고 싶습니다.

울타리를 벗어나 어쩌다 길 위에 있게 된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과는 다른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사건을 겪거나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곤 하는데요. 


길 위에선 수없이 많은 직관적 판단을 하게 되더군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고 때로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서 보면 과거의 또 다른 경험을 떠올리며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관대한  견해를 얻는 과정을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정말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매력적이고 행복한 곳인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함께 꿈꾸고 고민하는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주-

관계 회복을 위해 떠난 여행, 생존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을 만나다

내가 살던 곳과 의지할 수 있고 익숙한 사람들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장 1-3절)


축복받는 삶을 보장하는 언약으로만 들릴 수도 있지만, 구약 성경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히브리인들의 고난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게 들어 생존을 위해 이집트로 간 아브라함 족속들은 이방인 노예로서 400여년 동안 살았다.

1848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었을 당시 유럽 노동 계급의 삶은 비참했다. 열악한 근로 환경과 저임금 그리고 비참한 주거 환경에 시달리던 수백만 명의 유럽인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탈출했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이주했다.


우리 부부의 여행의 출발점도 여행처럼 낭만적이지 않은 생존의 절박함이었다.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얼마 동안 별거를 했었다. 나는 집과 가족을 떠나 고시원에서 살았고, 비정규직 알바 노동자로 일 년 반을 일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가락시장에서 야채 하역을 하며 몸은 힘들고 맘도 편치 않게 보냈다.

그리고 한국 유명 제과점의 빵 공장에서 기계 제빵 작업을 했다.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가게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달프게 일하는지를 체험했다. 현대 자동차와 같은 거대 기업과 달리 근로 기준법의 사각 지대인 그곳에서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던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도 했다. 

별거하는 부부는 흔히 갈라서기 마련인데 우리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관계 회복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을 직접 마주 하게 되었다.

1997년 말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았던 경제 위기 상황은 많은 한국인들의 삶을 어렵게 하고 생존 형태도 바꿔 놓았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개척 교회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된 동서네는 결국 2000년 9살, 12살, 14살인 세 명의 자녀를 데리고 독일로 이주했다.

독일 유학생들이 모인 교회의 담임 목사로 처음 정착한 곳은 구 동독 지역인 튀링겐 주의 바이마르였다. 형식상 침례교 파송 선교사였지만, 재정 지원 없이 거의 불모지에 내던지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시리아 난민과 같은 이주민에겐 꽤나 관대한 면이 있다. 난민 자격을 부여 받으면 6개월의 무료 language course 과정을 지원받고, 직업 훈련 과정을 독일 정부가 보조해줄 뿐만 아니라 정착금도 지원해주며 독일 사회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린다.

다만, 독일의 원칙을 중시하는 합리주의는 이주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독일이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필요한 인력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강제 추방이다.

한국인 이주민도 그런 혜택을 받는다. 동서네 가족도 일반 비자가 있으면 제공받는 의료 보험(보험료가 한국보다 비싸지만 혜택은 거의 무상 수준임)과 양육비 보조, 자녀들의 의무 교육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동서 내외를 비롯한 3명의 자녀들은 독일 정부가 제공하는 language course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기본 언어가 되지 않는 자녀들이 인종 차별적인 시선이 있는 독일 학교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다.

한국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이 없는데다 적은 수의 가난한 독일 유학생들이 모인 교회의 한국인 이주민 목사 가정은 끼니를 굶는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은 이방인으로서 겪는 차별이었다.

구동독 지역인 바이마르는 구서독 지역의 대도시에 비해 외국인의 수가 적고, 민족 차별주의 성향이 강했다. 괴테와 실러가 살던 문학의 도시로 관광객에게 알려진 그곳에서 동서는 극우파 집단들에게 수차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독일인에게 독일어로 목회를 시작하다

a 캠니츠 시청앞 광장 조영래 목사가 길거리 찬양 전도를 시작한 곳이다.

캠니츠 시청앞 광장 조영래 목사가 길거리 찬양 전도를 시작한 곳이다. ⓒ 김성수


독일에서 한국인 목회를 하는 한국인 목사는 5년 기간이 지나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된다.이는 한국의 목사들이 자녀 무상교육 등의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독일행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가 어느 정도 부흥된 시기에 동서는 그 권리를 약속과 소명에 따라 포기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난다.

바이마르 교회에서 본인이 직접 침례를 준 교인을 교회 후임자로 초빙하고, 2005년 구동독 지역인 작센 주의 캠니츠에 한국인 최초로 독일 현지인 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조영래 목사이다. 캠니츠 시청 광장 한 편에선 지금도 매주 토요일 오후에 그가 캠니츠의 교회를 개척할 때 시작했던 길거리 찬양 전도가 계속되고 있다.

독일에서 한국인 목사들은 대부분 다수의 유학생과 자영업을 하는 한국인 대상 목회를 한다. 독일인에게 독일어로 목회를 시작한 한국인은 그가 처음이다. 캠니츠에 와서야 language course에서 정식으로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어 성경을 끊임없이 읽어가며 설교를 준비해 나간 그의 정성과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a 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 교회의 주일 예배 모습인데 아프리카 출신의 자매들이 나와 찬영을 하는 모습이다.

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 교회의 주일 예배 모습인데 아프리카 출신의 자매들이 나와 찬영을 하는 모습이다. ⓒ 김성수


독일의 개신 교회는 루터 교회와 침례 교회, 감리 교회, 오순절 교회, 형제 교회(목사가 없는 교회임) 등의 자유 교회로 분류된다. 독일 정부에 세금을 내고 재정 지원을 받는 독일 국가 교회는 루터 교회이고, 교회는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교회 활동을 할 수가 있다. 독일인은 신상명세서에 기독교인으로 분류가 되면 대부분 종교세를 납부하는데 루터 교회가 그 종교세의 지원을 받는다. 나머지 교회들은 한국의 교회와 같이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되지만 목사는 세금을 납부한다.

조영래 목사가 개척한 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는 루터 교회도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도 아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현지인 교회이다. 교인은 독일인이 다수이지만 세계 각국의 인종들로 구성된 다민족 교회이다. 교회의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고 설교도 독일어로 하지만, 설교 후 교인들끼리의 교제는 영어로 가능하다.

주일 예배를 직접 몇 번 참석해보니 출석 교인은 70여명 정도인데, 교회가 협소해 서있는 사람도 보인다. 우선 예배 전에 독일, 미국, 가나, 한국 국적의 청년들이 함께 하는 영어 찬양이 아주 흥미롭다. 설교 성경 구절을 각 국적의 신도들이 독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베트남어, 중국어, 한국어로 봉독하는 광경은 진기하다.

목사의 설교 후에 원하는 교인들 몇몇이 자신의 일상 종교 체험 또는 설교와 같은 견해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밝히기도 한다. 한 번은 목사가 자리를 비운 금요 찬양 예배에서 가나 유학생 청년이 영어로 설교를 했다. 한국의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은 자유로움과 유연함이다. 

a 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의 유아들 여러 인종의 얘기들을 볼 수 있다.

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의 유아들 여러 인종의 얘기들을 볼 수 있다. ⓒ 김성수


캠니츠는 구동독 시절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로 인구 20만 정도의 작지 않은 도시이다. 공장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해서 구동독 시절 Karl Marx Stadt(칼 마르크스 시티)로 불렸던 곳으로 마르크스의 동상이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한인 교회는 없다. Evangelische Internationale Gemeinde Chemnitz에 한국인 유학생과 교민이 몇 있긴 하지만, 캠니츠의 한국인 유학생을 비롯한 한국인들은 현지인이 다수인 이 다민족 교회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찌히의 한인 교회로 간다. 아무래도 여러 국적의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 한국인끼리의 편안함을 더 선호한다.

현재 조영래 목사는 부인 그리고 캠니츠에서 출생한 두 명의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주민이 독일 사회에서 독일인과 같은 혜택을 누리며 권리를 보장 받고 현지 사회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선 일단 영주권을 취득해야 한다. 독일에서 이주민은 기간을 갱신해야 하는 일반 비자나 노동 비자(독일에서 일을 하기 위해 발급 받아야 하는 비자)를 발급 받은 지 5년이 지나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구동독 지역인 이 곳은 아직까지 민족주의적인 차별 성향이 강한 곳이다. 조영래 목사는 사단법인인 독일 독립 교회의 운영 위원회에서 초빙된 목사 자격으로 적지만 급여를 받아오고 있다.

하지만, 독일인의 평균 급여에 훨씬 못 미치는 급여를 받고 있는 일종의 영세민으로 분류가 되어 있고 독일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있다. 이것이 표면적인 영주권 발급 불가의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캠니츠에서 10년 이상 독일인과 다민족 이주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독일 사회의 인종 통합과 사회 안정에 기여한 면이 있다. 루터 교회 목사도 아닌 이주민 그것도 동양인이 독일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의 목사로 일한 전례가 없다는 민족적 편견 또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 지역을 떠나 구서독 지역에 살고 있는 딸과 아들은 현재 영주권을 취득한 상태이다) 

a 칼 마르크스 동상 캠니츠 시내의 구동독의 공산당 관사 건물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칼 마르크스 동상 캠니츠 시내의 구동독의 공산당 관사 건물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은 곳임을 알 수 있다. ⓒ 김성수


#캠니츠 국제 열방 교회 #조영래 목사 #칼 마르크스 #독일 #루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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