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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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의 항일운동→반독재투쟁으로 일관한 저항정신의 발로는 어릴 적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차별에서 발아된 것이다. 자칫 어릴 적의 저항심은 반사회적ㆍ반윤리적으로 발산되기 쉽지만, 그는 민족의식으로 발현되고 큰 인물로 성장하는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8, 9세 때 일이다. 당시 재상(宰相)이던 문정공(文貞公) 이도재(李道宰)씨가 우리 동네 안골에 있는 그분의 친산(親山)에 해마다 한식ㆍ추석 절사(節祀)에 참사하러 오는데 꼭 내 집에 들렀다. 내 아버지와는 거의 이십 년 연하이므로 꼭 와서 뵙고 가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 이 해에는 내가 『시전(詩傳)』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어른 오던 그 날에는 진풍(秦風)의 사마편(駟馬篇)과 소융편(小戎篇)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 어른이 "아 숙성하다. 네 나이에 벌써 <시전>을 읽다니, 너 오늘 배운 사마ㆍ소융 이 두 편을 암송(暗誦)하고 그 뜻을 해설할 수 있겠느냐?" 하기에 신바람나게 두 편을 모두 외우고 뜻을 말씀드렸다. 그는 아주 신기해 하며 칭찬을 하고 돌아갔는데 그 다음날 하인을 우정 보내며 마구리에 '청(靑)'ㆍ'홍(紅)' 딱지 붙인 두루마리와 향내가 물씬물씬 나는 먹(黑)과 붓을 보내 주었다. 그 때의 그 기쁨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영민한 소년이 궁벽한 시골에서 자라고 있을 즈음 나라의 사정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살해되고 김홍집 내각은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민비 살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유생들이 봉기하는 을미의병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반일 감정이 높아진 상태에서 이범진ㆍ이완용 등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공모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서재필이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최초의 시민단체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조선사회는 격동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주석
3> 『구술 해공 자서전』, 48쪽.
4> 유치송, 앞의 책, 61쪽.
5> 『구술 해공 자서전』,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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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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