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형무소 방화6.25 당시 적대세력에 의해 방화된 청주형무소 모습.
진실화해위원회
석수천은 밧줄로 몸이 묶인 채 송계리로 끌려왔다. 당시 한수면 송계리에 살던 홍택주(1936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석수천은 자신이 묶여서 끌려가는 것이 부끄러운지 밧줄로 묶인 손에 나뭇잎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청주에서 온 인민군에게 넘겨졌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청주형무소에는 충북의 내로라하는 우익인사와 피난 가지 못한 경찰, 형무소 간수 등이 구금된 상태였다.
소위 악질반동(?)이 갇혀 있는 청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9월 들어서면서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 진작에 전선이 낙동강에서 고착화되면서 조만간 UN군이 반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랬기에 감방에 갇힌 이들 중에서도 일부 악질(?)들을 선별해 공개 처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공개처형 장소는 형무소에서 가까우면서도 청주 한 가운데인 무심천으로 낙착되었다. 청주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9월 어느 날 석수천을 포함한 일단의 무리들이 뒷결박 당한 채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로 이송됐다. 그들이 처형될 찰나에 윙하는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미군의 정찰기 소리였다. 사형 집행인들은 급하게 상황을 종료시키고 형무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추석을 이틀 앞둔 1950년 9월 24일 청주형무소에 구금돼 있던 이들이 뒷결박 당한 채 당산으로 끌려갔다. 사전에 파놓은 긴 구덩이에 앞에 서 있는 이들은 오금을 저렸다. 잠시 후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서다.
그들의 예측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총알도 아까운지 쇠망치로 고개 숙인 이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뇌수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인간사냥은 이뤄졌다. 그다음날인 25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형무소 안에서 싸한 휘발유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며 웅성대는 사이 불길이 치솟았다.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한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형무소 감방에 불을 지른 것이다. 감방 안에서는 아우성이 터졌다. 곧이어 구금돼 있던 이들이 쇠창살을 밀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속도에 비례해 쇠창살을 미는 힘도 거세졌다. '쿵' 하며 쇠창살이 쓰러졌다. 이날 불길 속에서 살아난 이는 김흥권을 포함한 200여 명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주지역 신교식 등 8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및 강제연행(납치) 사건>, 2008).
그런데 그곳에서 살아난 이중에는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의 석수천도 있었다. 그때까지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세 번만 석수천의 손을 들어줬다.
청주형무소에서 탈출한 그가 송계리에 돌아와서는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오랜 기간 병 앓이를 하다가 숨졌다.
다른 운명
죽음의 고비를 세 번 넘겼지만 병마와 힘겹게 싸우다가 죽은 석수천과는 다른 삶을 산 이도 있다. 송계리 대한청년단장 석대청은 1949년 1월 빨치산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돌로 머리를 타격당하고 그의 집이 불탔으나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빨치산 토벌대 활동을 지속했다.
살미면 무릉리 분소(살미지서 분소)장 안갑준은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1947년도에 경찰에 입문한 그는 한국전쟁 전 충주군 살미면 무릉리에서 분소장을 하면서 빨치산 토벌에 공훈을 세웠다.
그 이후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경찰전문학교 교장과 충북도경찰국 국장을 거쳐 충남·북 도지사, 경기도지사, 전남·북 도지사를 했다. 그의 행운은 계속 이어져 제10~1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물론 관운과 벼슬(국회의원)운이 따랐다고 해서 꼭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석수천은 이들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으며, 석수천과 맞서 싸운 빨치산들의 삶은 더욱 그랬던 시절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공유하기
투표함 부수려던 불청객, 죽창 찔려가며 싸운 남자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