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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곧 예수'라는 믿음

[정진동 평전] 도시산업선교회 실무 훈련

등록 2024.10.26 10:23수정 2024.10.3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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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기자말]
"고생했습니다!" 환한 미소로 정진동을 반기는 이는 조지송이었다. 늦깎이로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교육(훈련)에 참여한 정진동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랬기에 조지송의 환대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조지송이 처음부터 따듯하진 않았다. 장신대 신학교 동기인 조지송은 훈련 도중 "훈련받다가 어려워서 포기한 이들이 많아요. 정 목사도 적성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중단하세요"라고 했다. 정진동은 이 말에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조지송이 자신을 걱정해서 한 이야기인지, 자극을 주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조지송은 1961년 장신대 졸업 후 강원도 태백군(현재 태백시) 장성 탄광의 노동 체험을 시작으로 1963년 한국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안수를 받았다. 정진동이 실무교육을 받으러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예수교 장로교 전도부 내 도시산업선교 훈련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도시산업선교계의 베테랑이었다. 그렇기에 교육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교육생들에게 자극을 줘 자발적 활동을 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송이 정진동에게 한 말은 적극적 자발성을 끌어내기 위한 채찍질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기둥

 소모임 진행.
소모임 진행.영등포산업선교회

교육생에 불과한 정진동이 조지송의 심중을 헤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나 같은 교육생인 인명진(1946년생)이 <무궁화 유지공장>에 금방 취업해 노동 체험을 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11세나 연하인 20대 후반의 인명진이 원만하게 교육코스를 밟고 있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마흔이 다 된 나이 탓으로 현장 취업도 잘 안 됐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노동 체험 6개월을 마치고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입성(?)을 했으니, 정진동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이 컸다.


그렇게 당당하게 입성했지만 6개월간의 실무교육은 이제 시작이었다. 실무교육 총괄은 당연히 조지송이 맡았다. 그는 정진동의 친구이자 동지이자 스승으로서 정진동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지송은 "노동자 인권침해는 곧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가식과 거짓 없는 마음과 얼굴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라고 했다. 조지송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진동의 폐부에 와 닿았다. 사실 유신 치하에서 종교계, 특히 개신교계에서 발표한 대부분의 성명서는 조지송의 손을 거쳐 갔다.


그렇기에 조지송은 단순히 도시산업선교의 지도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의 기둥이었다. 조지송의 선교 방법과 노동자에 대한 사랑은 매우 헌신적이었기에 '노동자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조지송은 정진동과 교육생들에게 소모임 조직과 운영 등에 대해 체계적인 지도를 했다.

또한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도 주안점을 뒀다. 결국 이는 신학과 철학의 문제로 귀결됐다. 당시는 '민중신학'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정진동은 14년간 농촌선교를 하면서 농민의 삶을 몸으로써 체득했다. 그런 연유로 교육사업과 농촌 잘살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러한 농촌계몽운동이 농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도시산업선교회 실무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답안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이상한 교회 가지 마!"

황선금은 회사 측으로부터 "이상한 교회에 가서 공부하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 관리자 앞에서는 머리를 수그렸지만 뒤돌아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대한모방 관리자가 말한 '이상한 교회'란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말한다. 황선금은 지난 몇 개월간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을 진짜로 위하는 사람(세력)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았다. 1956년 창립한 대동모방은 이후 대한모직을 흡수해 대한모방을 창업했다. 1972년 당시 대한모방의 노동환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12시간 맞교대라 1주일에 72시간 이상을 근무했다. 주간반과 야간반은 일요일에 각각 6시간씩을 초과 근무해 주간 노동시간이 무려 78시간에 달했다.

이토록 장시간 노동을 하다 보면 잠이 부족해서 기계 앞에 서 있어도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늘 몽롱하게 마련이었다. 문제는 그런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매달 1회, 기숙사에 사는 노동자에게는 매주 1회 작업시간 이후에 강제로 예배를 보게 한 데 있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노동자도 무조건 참가해야 했다. 만일 이를 어기면 기숙사생들에게 외출 금지 조치나 변소 청소, 풀 뽑기 등 강제 노동을 벌칙으로 부과했다(김남일,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2010).

이런 지옥에서 반기를 든 이가 있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소그룹 활동을 하고 있던 임정자였다. 영등포 일대 공장지대의 형편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황선금이 대한모방에서 이직한 한국모방이 그러했다. 1953년 한국견방으로 출발한 한국모방(1963년)은 1974년 회사 이름을 원풍모방으로 바꿨다.

 체육대회 응원모습.
체육대회 응원모습.영등포산업선교회

한국모방 노동조합은 1972년에 퇴직금 찾기 운동과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투쟁이 성공리에 이뤄질 수 있었던 데에는 조합원들의 소모임 활동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1971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소모임은 샛별, 소띠, 빅토리 등으로 시작해서 쥐띠, 뿌리, 역부공, JOC 모임, 성우회, 친목회 등 20여 개 조직으로 확대됐다. 이 조직들은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소모임은 영등포산업선교회(장로교) 조지송 목사와 카톨릭노동청년회(JOC)의 도요한 신부, 경수산업선교회(감리교)의 안광수 목사 등이 지도했다. 아래로부터의 소모임 운동과 민주노조 지도부의 노동단체와의 적극적인 연대는 한국모방(원풍모방) 노동조합이 19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대들보로 자리매김하는 원천이었다.

이러한 한국모방-원풍모방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에는 소모임-방용석 지부장-조지송 목사가 있었다. 정진동은 실무교육(훈련) 기간 한국모방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목격했다. 또한 조지송의 매시기 투쟁 전술 지도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살아 있는 노동운동'을 학습했다.

조화순과 이문영

정진동은 한국모방 투쟁을 옆에서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영등포역 기지창에서 노동자 교육을 하기도 했다. 영등포역 기지창은 철도 보급품을 조달하거나 비축해 분배하고 정비하는 임무를 맡은 기지(시설)이다.

정진동이 한국모방과 영등포역 기지창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교육을 했지만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시기를 전후한 도시산업선교 실무교육(훈련) 코스를 보면 정진동의 활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6개월간의 노동 체험이 첫 번째 코스다. 둘째는 6개월간의 실무교육(훈련)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은 노동자 소모임 조직과 그룹 강의를 해야 한다. 소모임은 약 5~7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소모임은 정해진 틀이 없다. 각 사업장의 특성과 노동자들의 구성 및 욕구에 따라 다종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진다. 등산모임이나 축구 등 스포츠 모임과 바둑, 장기, 영화 등이 그것이다.

여성의 경우는 훨씬 많은 소모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꽃꽃이, 수예, 뜨개질, 요리 등이 가장 인기 있는 모임이었다. 당시 섬유·방직, 식품, 가발업체에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는 대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주를 이뤘다.

여성 노동자 대부분의 꿈은 예비 신부수업을 잘 받아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지향했던 제조업체 여성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지송과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그런 생각의 옳고 그름을 우선 따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노동조건 개선이나 권리 요구, 노동조합 건설 같은 문제는 동료 노동자와 믿음이 형성된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은 적중했다. 같이 일하고, 밥 먹고, 시시덕거리며 친자매처럼 친해지면 이후에는 일사천리였다. 그런 믿음 관계가 형성되면 민주노조운동의 열기는 밤새 열기가 유지되는,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뜨뜻해지는 온돌방과 같았다.

정진동도 그런 교육 일정과 원칙 속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런 일과 속에서 그는 숱한 종교계, 학계 인사와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을 접했다.

조화순 목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후일 '똥물 사건'으로 유명한 인천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1934년생 조화순은 1966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두 번째 파송지인 경기도 시흥 달월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어느 날 조지 오글 목사와 조승혁 목사가 찾아와 산업선교회 일을 제안했다. 산업선교라는 말조차 낯설던 때 조화순은 짐을 쌌다. 동일방직에서 6개월간의 노동 체험을 하고 인천산업선교회 총무를 맡았다. 1972년 동일방직에 주길자 지부장이 당선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화순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영원히 기억될 인물이다. 정진동은 실무교육 당시 그를 만났다. 이외에도 김경락 목사,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수료식. 맨 뒤 우측에서 3번째가 정진동 1973.6.15.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수료식. 맨 뒤 우측에서 3번째가 정진동 1973.6.15.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의 도시산업선교 실무교육의 마지막 코스는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였다. 1973년 3월 20일부터 6월 15일까지 3개월 코스로 진행된 노동교육은 야간에 이뤄졌다.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는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경영 문제에 대한 강의도 행했다. 연구소 소장은 법학박사인 이문영 교수가 맡았다. 강사로는 김낙중, 노중선, 김찬국 교수 등이었다. 당시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는 서강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와 쌍벽을 이루는 전문 노동교육 기관이었다.

노동자가 예수다

이외에도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사회교육의 메카 역할을 했다. 당시 시대의 지성과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단골 강사였다.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과 재야 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백기완과 학계의 성래운 등이 그들이다.

사실 정진동이 1988년 청주 택시 파업을 이끌면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사회교육의 메카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1972년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교육을 받으면서 만났던 종교계, 학계, 민주화운동 지도자들과의 교유(交遊) 덕분이었다.

하지만 정진동이 실무자 교육을 받으면서 만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다름 아닌 노동자 예수이다. '노동자가 곧 예수이고, 예수님을 받들듯이 노동자들을 대하라'는 민중신학 사상을 접한 것이다.
#조지송 #도시산업선교 #소모임 #조화순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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