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대회 응원모습.
영등포산업선교회
한국모방 노동조합은 1972년에 퇴직금 찾기 운동과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투쟁이 성공리에 이뤄질 수 있었던 데에는 조합원들의 소모임 활동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1971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소모임은 샛별, 소띠, 빅토리 등으로 시작해서 쥐띠, 뿌리, 역부공, JOC 모임, 성우회, 친목회 등 20여 개 조직으로 확대됐다. 이 조직들은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소모임은 영등포산업선교회(장로교) 조지송 목사와 카톨릭노동청년회(JOC)의 도요한 신부, 경수산업선교회(감리교)의 안광수 목사 등이 지도했다. 아래로부터의 소모임 운동과 민주노조 지도부의 노동단체와의 적극적인 연대는 한국모방(원풍모방) 노동조합이 19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대들보로 자리매김하는 원천이었다.
이러한 한국모방-원풍모방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에는 소모임-방용석 지부장-조지송 목사가 있었다. 정진동은 실무교육(훈련) 기간 한국모방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목격했다. 또한 조지송의 매시기 투쟁 전술 지도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살아 있는 노동운동'을 학습했다.
조화순과 이문영
정진동은 한국모방 투쟁을 옆에서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영등포역 기지창에서 노동자 교육을 하기도 했다. 영등포역 기지창은 철도 보급품을 조달하거나 비축해 분배하고 정비하는 임무를 맡은 기지(시설)이다.
정진동이 한국모방과 영등포역 기지창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교육을 했지만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시기를 전후한 도시산업선교 실무교육(훈련) 코스를 보면 정진동의 활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6개월간의 노동 체험이 첫 번째 코스다. 둘째는 6개월간의 실무교육(훈련)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은 노동자 소모임 조직과 그룹 강의를 해야 한다. 소모임은 약 5~7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소모임은 정해진 틀이 없다. 각 사업장의 특성과 노동자들의 구성 및 욕구에 따라 다종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진다. 등산모임이나 축구 등 스포츠 모임과 바둑, 장기, 영화 등이 그것이다.
여성의 경우는 훨씬 많은 소모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꽃꽃이, 수예, 뜨개질, 요리 등이 가장 인기 있는 모임이었다. 당시 섬유·방직, 식품, 가발업체에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는 대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주를 이뤘다.
여성 노동자 대부분의 꿈은 예비 신부수업을 잘 받아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지향했던 제조업체 여성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지송과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그런 생각의 옳고 그름을 우선 따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노동조건 개선이나 권리 요구, 노동조합 건설 같은 문제는 동료 노동자와 믿음이 형성된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은 적중했다. 같이 일하고, 밥 먹고, 시시덕거리며 친자매처럼 친해지면 이후에는 일사천리였다. 그런 믿음 관계가 형성되면 민주노조운동의 열기는 밤새 열기가 유지되는,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뜨뜻해지는 온돌방과 같았다.
정진동도 그런 교육 일정과 원칙 속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런 일과 속에서 그는 숱한 종교계, 학계 인사와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을 접했다.
조화순 목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후일 '똥물 사건'으로 유명한 인천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1934년생 조화순은 1966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두 번째 파송지인 경기도 시흥 달월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어느 날 조지 오글 목사와 조승혁 목사가 찾아와 산업선교회 일을 제안했다. 산업선교라는 말조차 낯설던 때 조화순은 짐을 쌌다. 동일방직에서 6개월간의 노동 체험을 하고 인천산업선교회 총무를 맡았다. 1972년 동일방직에 주길자 지부장이 당선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화순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영원히 기억될 인물이다. 정진동은 실무교육 당시 그를 만났다. 이외에도 김경락 목사,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