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환원을 거부한다

등록 2001.06.25 18:00수정 2001.07.3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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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주 옛날도 아닌 것이 그 때는 1990년 무렵, 동서독이 새로 통합되고 소련이 여러 나라로 갈라지면서 바야흐로 세상의 분위기가 바뀔 때였다. 내가 아는 어느 좌파운동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한국은 세계사의 흐름과 맥락을 달리하는 면모가 있어 많은 좌파 운동 조직이 생겨나면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활발해지고 이에 따라 이른바 '조직사건'이라 하여 안기부나 검찰에 연행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NL이다 ND다 PD다 하여 사회변혁의 방향과 방법을 둘러싼 논의와 논란이 어느 때보다 많았다.

그 무렵에 어느 좌파 운동 조직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쌍의 동지적인 애인들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NL계열에 속해 있었다. 또 두 사람 모두 그 조직사건이라는 것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여자는 먼저 나올 수가 있었으나 남자는 실형을 선고받아 젊은 나이에 제법 긴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참으로 자유가 없었고 최소한의 인권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었다.

여자는 남자를 면회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NL 계열이 아니라 PD 계열이었다. 그때 PD계열의 조직에서는 그녀에게 애인과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사상이 다른데 동지적 애인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과연 그럴까? 사랑이라는 것이 사상의 차원에서 운위될 수 있는 성질의 감정작용일까? 여자는 고민을 거듭했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았으나 종국에 일은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랑조차 사상의 잣대로 재려는 좌파 특유의 생리적인 냉혈함 때문일까? 만약 좌파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면 좌파에는 오늘이 없듯 내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랑을 사상 차원의 문제로 이해하는 그릇된 본질주의, 본질환원주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의 본질 구하기는 마치 양파껍질 벗기기 같아서 본질을 찾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하나하나 벗겨가도 그 최후에 기대했던 '본질'이라는 것은 모습을 찾을 길 없다. 대개 옛날 한국 좌파들이 이런 식의 본질주의에 빠져 방법론의 차이를 사상의 차이로 과대시하고 사랑조차 사상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결벽증'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본질주의를 좌파만의 속성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끔 한나라당의 우익연하는 분들이 최근의 남북협상을 북한정권에의 투항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 본질 환원적 성향은 그들의 것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의 '안티조선' 운동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안티조선' 운동은 좌파운동, 진보적 운동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예의 그 본질주의, 본질환원주의는 그 명확한 한 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행로를 비판함은 물론 필요하고 타당한 일이다. 어제 진보적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구금하고 금강산 댐같은 정치쇼를 벌이는, 군사독재체제를 지원하는데 여념이 없던 신문이 오늘 시치미를 뚝 떼고는 정직한 우파인 것처럼 딴소리하고 언론의 자유를 고창하는 것을 보면 그 몇몇 분들의 정신상태가 어떤지 능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태를 비판하고 더 나은 신문의 모습을 제시함에 그치지 않고 '안티조선'을 무슨 '대적전선'의 개념처럼 이해하면서 그곳에 글을 쓰면 '적의 수중에 떨어진' 사람이나 되는 듯 흥분한다면 이는 예의 그 본질환원주의의 신판을 보여줌에 다름 아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현상을 '안티조선'이라는 짧은 자로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은 수많은 국면과 차원의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글, 곧 말은 그 같은 본질 환원을 거부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말은 그것이 읽히고 들리는 순간 읽는 이들과 생생한 정신적 교섭을 행한다. 말이 정녕 제도와 권력을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교섭 가능성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지면에 글을 쓴다면 그 말은 조선일보의 정치적 색채에 위축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주는 분들과 교감하는 일마저 차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이 자기 본연의 빛을 모두 잃어버리고 제도와 권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은 환원을 거부하고 그 말을 듣고 읽는 사람과 교감을 주고받는 생생한 경험의 현장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문학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 사람이 말의 그런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제도와 권력의 지도에 따라 자기를 규정해 버린다면 그 말은 예의 그 양파속처럼 허무한 본질에 구속된, 자유 없는 말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쓰되 나의 생각을 저버리지 않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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