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에서 살고 싶다

등록 2001.07.06 07:38수정 2001.07.0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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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에 '개성집'이라 하여 아는 사람은 아는 음식점이 하나 있다. 서울의 소문난 집을 소개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바로 앞에 있는 '학원'이라는 책 도매점에 들렀다가 우연찮게 이 음식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조랑떡국을 먹었고, 또 한 번은 양곰탕을 먹고 나오는데 그 집에서 손수 만든 개성순대가 하도 먹음직스레 보여 내 조선적인 입맛을 스스로 탓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 갔을 때 이 '개성집'의 여주인이 몇 년 사이에 훌쩍 젊어졌기에 '아하, 따님이시겠구나' 생각하고 주인이 바뀐 것 같다고 말을 건네 보았다. 노인이 연로하셔서 이제 갓 중년에 접어든 따님이 그 장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계시면 제가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네요."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계산을 치르면서 고향이 개성이라는 그 노인을 다음에라도 혹여 만날 수 있었으면 했다.

고향이 전라북도 임피였던 일제시대 작가 채만식이 개성에 가서 몇 년 산 적이 있었다. 주량은 많지 않아도 술을 즐기는 편이던 그였다. 개성의 술집 문화가 다른 지방에 비해 다채롭다고 이런저런 유형의 술집들을 소개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중에 하나로, 일종의 선술집인데 손님이 들어가서 무슨 은행 창구 같은 구멍으로 돈을 내밀면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가 술과 안주를 쑥 내미는, 옛날 민담에나 나오는 무슨 '팔뚝집' 같은 것도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그의 전집을 찾다찾다 층층이 쌓인 책들 탓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오늘의 개성에 가면 그런 술집 문화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번에 나는 월드컵경기장으로 통하는 길을 넓히고 있는 합정동에 문화적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한탄했었다. 그런데 이 문화적이지 못함이란 무엇인가. 나는 단연코 옛날과 현재가 공존하지 못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가 옛날을 부단히 대체해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과거는 사적과 유물과 유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경복궁 안에 버젓이 조잡한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는 마당에 하물며 합정동에서야 무슨 옛 정취를 찾을 수 있으랴.

서울의 북쪽에 '개성집'이 있음은 월남한 한 여인이 생활해야 했기에 만들어낸, 희귀하면서도 우연적인 문화적 가치일 것이다. 나는 사적과 유물과 유품이 아니라 생활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과거를 원한다. 지금 그것은 우리 곁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과거를 다시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의 근대인의 눈으로 자기의 과거를 '환상적으로' 재구성하는 행위에 그친다 해도 그런 '환각'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자기 없는 생을 이어가게 될 뿐이다.


누구, 새 길 넓고 지하철역 두 개나 있는 합정동에 수수하고 한적한 옛날 하나 만들어줄 분 안 계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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