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박이 도시들이 슬프다

등록 2001.09.01 07:14수정 2001.09.0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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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경주에 갔다 참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했다. 고도(古都)의 기운이 물씬 풍겨나는 낮은 건물들의 도시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본래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지만 그곳 한정식은 경상·전라·충청 맛이 마구 뒤섞인, 불쾌한, 서울의 인사동 음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곳곳에 흩어진 고분이며 절터는 또 얼마나 분위기 있는가.


도시라 해도 사는 사람 다르고 역사가 다르므로 저마다 이채를 띠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불행히 우리 도시는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서울의 한 부심지나 변두리를 떼어다 놓은 듯한 풍경이다. 내가 자란 대전이 그렇고 그 전에 자라던 공주마저 그렇다. 그나마 공주는 한 때 백제 수도였고 금강을 끼고 산성이 있어 나은 편이다. 청주 같은 곳은 영낙 없는 대전 축소판이다. 그래도 예술문화 면에서는 대전보다 낫지만... 한옥 많다는 전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구나 부산도 그랬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리나라 남한이 일종의 도시국가로 변모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싱가포르나 홍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넓은 배후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배후지 농촌과 산야조차 이제는 판박이 도시들의 일부로 변해가고 있다. 읍·면을 가도 서울 한 부분 같은 느낌이 든다. 그곳만이 지닌 고유한 문화, 빛깔이 없다. 밤에 아무리 현란한 네온 불빛이 번쩍거려도 결국은 무채색 도시들이다.

1984년 스무살 때 반(半) 무전여행으로 기차 타고 목포에 간 적이 있었다. 밤에 도착해서 다방에 들어갔는데 걸려 있는 그림들이 예술적으로 보여 좋았다. 유달산에 올라갔는데 밤안개가 자욱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점점이 흩어진 흐릿한 도시 불빛들이 전혜린의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슈바빙을 연상케 해서 마음이 아련했다. 항구까지 걸어가는데 물기 많은 바람에 실려오는 갯내음과 한적한 밤 풍경이 객창감을 만끽하게 했다. 남도를 여행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20년만에 그런 이채(異彩)조차 사라졌다. 오로지 경제적 이해타산으로 세워진 건물들의 도시는 끔찍스럽게도 개성이 없다. 전국 곳곳을 똑같은 집과 거리를 만드느라 마구 파헤치고 있다.

콘크리트와 시멘트와 철근으로 쌓아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이제 사라졌으면 싶다. 작은 '도시국가'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다채로울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막 문화적인 도시 개념이 확산되고 있는 듯하지만 지금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우리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황량하고 삭막한 한국적 근대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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