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자중독증에 걸려 있다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1.08.31 08:24수정 2001.08.3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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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자중독증에 걸려 있다.


학교에 다닐 때 책을 보며 캠퍼스를 걸어다녔으므로 어쩌면 나를 공부깨나 하는 사람으로 착각한 이도 있겠다. 학교 안만이 아니라 거리를 걸을 때도 지하철을 타고도 나의 독서는 그치지 않는다. 식사할 때 신문이나 책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 볼일을 볼 때도 본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할 때도 뭔가 읽을 거리를 갖다 놓고 비눗물이 들어가 잔뜩 찡그린 눈으로 본다. 대화를 나누어야 할 상대를 놓고도 책이나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무례를 범한다.

그 가운데 압권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책을 본다는 사실이다. 청주나 천안으로 시간강의를 다니는 나는 대개 고속버스나 기차를 이용하지만 간혹 시간이 늦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을 때는 자동차를 운전해 간다. 그런데 이 때도 나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들 속에서 책을 본다. 어떤 책은 밑줄을 긋기까지 한다. 달리는 차들 속에서 문자를 찾아읽는 스릴이 만점 이상이다. 나도 모르게 이 아슬아슬함을 즐기면서도 너무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면 맨 바깥 차선으로 나가 80Km 이하 트럭의 속력으로 천천히 달리곤 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내가 달리고 있다기보다는 무중력 상태로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데, 그것도 좋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스럽게 내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을 해왔으며 모르는 이들에게 커다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그런 위험한 짓은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읽은 책의 내용을 내가 과연 기억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마도 문자중독증이란 책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다만 문자를 읽고 있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정신불안증인 것 같다. 죽음의 속도의 불안을 능가하는 심리적 안정이라니. 이는 아무래도 지독한 직업병 아니면 문명병이다.


중독이란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지켜낼 방도를 자기 내부에서 찾지 못하고 자기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만 자기를 존립시킬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 같다. 알콜중독, 약물중독, 문자중독, 섹스중독 같은 말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리고 이제 인터넷 중독이 생겨났다. 인터넷에 들어와 끝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 특정한 사이트에 매달려 한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말의 '향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


채팅까지 즐기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내 친구다. 문자중독증 환자의 이웃이고 그 최첨단 변이 환자이다. 생각해 보면 문자의 세계나 사이버공간은 그 얼마나 활기 없는 공간인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바로 옆에 환하고 푸른 산야가 펼쳐져 있는데도 죽음의 속도로 문자를 보며 달리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나는 이 에세이를 그것을 읽는 순간에만 탐닉하는 나의 어리석은 동료들을 위해 쓰고 싶지 않다.

문자나 인터넷을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주체적인 자기 삶의 보충물로 간주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을 생기 있게 살아가는 이들일 것이다. 중독을 모르는 그 오전(午前)의 인간들이 나는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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