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묵은 '목마 레코드'에 가다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1.12.03 13:09수정 2001.12.0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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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예'의 오래된 92년판 'NOSTALGIC' CD를 찾아나선 지 몇 달, 그 동안 용산 전자상가 레코드 가게에 들러보고 인터넷 중고음반 가게에도 들러보고 이 동네 저 동네 오래된 음반까지 함께 파는 헌책방에도 들러보고 청계천 벼룩시장에 중고음반 전문 취급점에도 들러 보았으나 그녀의 CD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녀의 깊게 패인 허스키 보이스를 다시 한 번 듣고 싶었으나 오래 전에 잃어버린 테이프를 대신해줄 CD는 어디서도 구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음반에도 한국의 여타 상품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 작용하고 있었으니, 새로운 모든 것은 연기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림인가? CD도 자동차나 자동차 용품이나 컴퓨터, 진공청소기 모델이나 다름이 없어 3년만 지나도 좀처럼 구하기 힘든 골동품이 되어버린다.

멋모르고 상점에 들러 찾다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나는 낡고 오래된 것에 목마른 사람이 되어 이 첨단의 도시를 살아간다. 어디에도 추억이 깃들 곳이 없는 사람처럼…….

어제 신촌에 있는 '목마 레코드'에 갔었다. 다른 음악 CD를 사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레 꼭 그 자리에서 들어야 할 곡이 있었으되 일요일인지라 문 연 곳을 찾기 어려웠다. 문득 생각난 곳이 바로 '목마 레코드'점이었다. 그곳은 열었겠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마 레코드'는 밤 열 시가 넘었는데도 신촌 로타리 뒷골목에 불을 환히 밝히고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CD를 구비해 놓은 채로.


그런데, 갑자기, 혹시 이곳이라면, 지예의 CD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과히 크지 않은 레코드점이므로 새로운 음반이 들어올 때마다 낡은 음반은 판매대에서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겠으나, 혹시……?

점원에게 지예의 CD가 있느냐고 묻자 이게 무슨 일인가? 그녀의 입에서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가. 딱 한 장 남아 있노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계산을 치르면서 중년의 주인 여인에게 물었다.


"목마가 지금 몇 년 되었지요?"
"26년, 이제 27년째 됩니다. 그런데 지예가 뭘 불렀던가?……"
"……"

지예는 아주 허스키한 목소리로 매우 염세적인 노래를 불렀다. 가끔씩 그녀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울린다. 그 노래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는지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남아, 있었다, 올해로 27년이나 되는 레코드점에.

내가 성장한 대전 생각이 난다. 대사동에 '옐로우 서브마린'이 있었다. 지하에 있는 그 카페에 들어가 보면 온통 주황색 가까운 노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대전경찰서 뒷골목 '질투'에 들어가 보면 메마른 눈빛의 여인들이 벽에 걸려 있고, '큐빅'으로 가면 사방이 입방체들로 가득차 있었다.

동양백화점 사거리 부근에는 '가배'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커피 전문점도 있었는데 그 분위기와 맛이 좋았다. 모두 20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 아무 것도 없다. 홍명상가의 음악감상실도 사라져 버렸고 중구청 앞의 브라암스도 없다.

그곳에서 자란 '나'도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옛날 없는 거리를 헤매고 있지나 않는지? 27년밖에 안된 목마 레코드 점이 그토록 고맙게 느껴짐은 '우리'의 지독한 가난 때문이 아닌지?

지예의 '노스탤직'을,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한 중고 카스테레오에 끼워넣자 그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옛날처럼,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우리'의 정신적 가난을 위무해주는 것만 같았다. '목마 레코드점' 같은 곳이 있으므로 우리는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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