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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의 향기로 사회를 아름답게'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태안문학회'의 모든 공식 문서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충남도에 보내는 지원금 신청서와 여러 기관·단체·업체들에 보내는 공문은 물론이고, 회보 등에도 그 슬로건을 적극적으로 써먹고 있는 거지요.
'문학의 향기로 사회를 아름답게'라…. 과연 가능한 것일지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측면이 더욱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일종의 '투쟁 의지'로 이 문구를 더욱 애써 사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아무튼 이 말을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인식시킬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내 목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가능성보다도 '희망'이 내게는 더 중요한 것일 듯싶습니다. 문학에 대한 희망, 더 나아가 문학의 참다운 사회적 구실을 소망하는 마음이 그런 작은 슬로건 하나에도 집착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참으로, 여전히 '희망'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희망이라는 말을 단지 가슴에 안고 살기만 해서는 너무 공허한 노릇이겠지요.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위나 행동이 따라야 그 희망은 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래서 생각한 것 하나가 후원회원 모집이었습니다. 오로지 '기금'의 창출만을 위해, 다시 말해 금전적 목적만을 생각하고 '지로 장표'까지 만들어서 후원회원을 모집하기로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후원회원과 관련하는 더욱 큰 목적은 책의 '가독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장에서 오랫동안 지역문예지를 만들어온 사람이라서, 지방문예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성까지 잘 압니다. 지역문예지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고생스럽게 만들어 대개는 '무료 배포'를 하게 되는데, 그런 만큼 가독률이 낮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태안문학' 이전에, 1983년 서산과 태안 지방의 문예지인 '흙빛문학'을 창간해서 제대로 키우기 위해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지역문예지들 중에서 유명한 축에 드는 흙빛문학이 저절로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바퀴와 날개를 달고 키워놓은 상태에서 1994년 일단 흙빛문학회에서 빠져 나와 몇 년 쉬다가 '태안'이라는 지명을 제호로 하는 명실상부한 우리 고장 문예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98년 태안문학'을 창간했는데, 흙빛문학과 관련해서는 필요성이 증대되면 적당한 기회에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흙빛문학을 할 때부터 무료 배포와 관련하여 가독률의 체감 쪽으로도 신경을 많이 기울여보곤 했습니다. 굳이 신경을 쓸 것도 없이, 그것은 '육감'의 작용에 의해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열 명당 2, 3명 정도가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결론이 나더군요. 그렇게 가독률이 낮아서는 고생의 보람을 얻기도 어렵고 낭비적인 측면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태안문학 창간 다음해부터 지로 장표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식으로 후원회원을 모으면서 후원회원 수의 상승 곡선과 병행하여 가독률의 체감 쪽으로 좀더 신경을 써보았습니다. 돈을 내고 책을 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가독률도 조금은 높아져서 열 명당 5, 6명 정도는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육감이 잡히더군요. 물론 대개는 육감의 작용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확인'과는 거리가 있는 것일 테지만….
후원회원이 아직은 7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다소 면구스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후원회원 모집과 관련하는 '희망'의 실체가 조금씩 가시화되는 것도 같습니다. '문학의 향기로 사회를 아름답게'라는 말이 전적으로 허무맹랑한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슬며시 해볼 수 있을 듯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학의 향기' 자체가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여하히 참다운 문학의 향기를 만들어 내느냐―그것이 최대의 관건이요, 난제라는 이야기지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회원님들에게 수시로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문학의 진정한 향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의 삶―아름다운 내면이 참으로 필요함을 역설하기도 합니다.
"문학의 향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문학 자체에 대한 신뢰와 희망입니다. 우리는 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외경심과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책을 사랑하면서 남의 글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구성원으로서 책에 실린 자기 글만 쏙 곶감 빼먹듯이 읽고 다른 회원의 글은 읽지 않는 이가 혹여 있다면 그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합시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적극적으로 신뢰합시다. 책(또는 지식)이 사람을 오히려 나쁘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회 활동을 뒤로 미루고 책만 읽어서는 안 되겠지만, 모든 사회 활동의 원천에는 책이 있어야 합니다. 틈틈이 책을 읽는 습성이 모든 삶의 기본이 되는 사회, 책이 사람을 만들과 사회를 가꾸는 세상―그것에 대한 희망을 뜨겁게 가슴에 안고, 더욱 적극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회원님들에게 이런 얘기를 강조하다 보니, 고장 신문인 '태안신문'에 그것과 관련하는 글도 쓰게 되더군요. 지난해 여름 태안신문에 썼던 칼럼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
지난 한해 동안 대학교 선생 노릇을 했다. 애초부터 일 년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무 고생스럽고 내 창작 활동에 지장이 많아서라는 이유를 대곤 하였지만 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문예창작과'가 '방송극작과'로 바뀐 탓이었다. 그러니 나 같은 소설가는 필요 없게 되었고, 그 선생 자리를 드라마 작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가 싫었다. 방송 드라마에 너무 밀리고 있는 순수 문학의 위축 현상이 결부되는 데다가 소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손상되는 일도 되겠기 때문이었다.
문예창작과를 두고 있는 대학들이 낭만적 분위기도 자아내던 '문창과'를 방송극작과로 바꾸는 일은 급속히 또 널리 확산되리라고 한다. 그것은 전파의 위력과 순수 문학의 위축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 지망생 시절부터 방송 드라마는 안중에도 없었다. 등단 전부터 드라마 작가들과도 종종 어울렸지만, '문학'이라는 것이 안겨주는 우월감과 자존심이 참으로 분명했다. 그때는 소설가가 되려다가 끝내 포기한 사람들이 방송 작가로 빠지는 경우도 많았고, 방송 작가들이 소설 작가들을 우러러보는 현상도 있었으므로, 나의 그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고군 분투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비장해지곤 한다. 지망생 시절의 그 열정과 낙방의 쓰라림과 우여곡절의 고초들을 어찌 다 회억하랴. 아무튼 내게 있어 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숭고하고도 장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의 위축 현상은 너무도 심각하다. 우월감과 자존심을 말하기도 쑥스럽다. 가뜩이나 책읽기를 싫어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활자를 멀리하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또는 오락거리에 열중한다. 그들 속에서 작가로서의 고독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잠수함 속의 토끼'와도 같은 작가의 메시지는 그야말로 공룡(전파)앞의 나뭇잎 한 장일 뿐이다.
급기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설 그만두고 방송극을 써보라는 말까지 듣는다. 돈도 벌고 더 유명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상당 부분은 이환경 씨(드라마 「용의 눈물」「태조 왕건」의 작가)가 여러 활자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 얘기를 한 탓이다. 지망생 시절 노동판에서 나를 만나 처음 글 짓는 법을 배웠다나…. 그 친구에게 싫은 소리도 했지만, 요즘 내가 감내하는 소설가로서의 모멸감은 참으로 여실하다. 그 친구에게 완전히 진 것 같고….
그러나 나는 문학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제 와서 방송 드라마 쪽에 빌붙을 수도 없거니와, 순수 문학 작가로서의 우월감과 자존심이 내 생명임을 다시 확신한다.
지난해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문화관광부와 한국마사회의 지원을 받아 실시한 '전국민 독서생활화를 위한 모교 방문 문학 강연' 사업에 참여하면서 책의 소중함과 문학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나 국민이 책을 읽지 않고 문학이 위축되고 있으면 소설가들이 나서서 저럴까 싶기도 했고, 동료 소설가들을 보며 안쓰러움과 무안함 따위를 동시에 느꼈지만, 그러자니 이상한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을 책과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괜한 허사가 아니다. 읽는다는 것은 뭔가. 그것은 우선 '뜻 있는 행위'이다. 지적 호기심의 발로이고, 탐구심의 표현이다. 그냥 쉽게 보고 즐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진지한 품성과 생각하는 버릇을 갖게 하고, 깊이 있고 폭넓은 분별의 세계를 지니게 한다. 진정한 지식도, 지혜의 폭과 질도 책이 있어 가능하다. 읽는 수고를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체계적인 사고와 탄력적이고 비판적인 이성을 지닐 수 없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품성을 지닌 잘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품성을 위해서도 책과 문학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
(2000년 <태안신문>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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