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안의 작은 기쁨들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지인들에게 메일을 대신하여

등록 2002.02.02 09:26수정 2002.02.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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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일의 어려움과 고달픔 속에서도 작은 기쁨과 소박한 보람들을 하나씩 이룩하거나 얻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게 있어서도 오늘 하루하루는 그것들을 잉태할 수 있는 조건들을 지닌 채 나아가고 있고, 또 그러므로 내 삶 속에는 늘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요즘 내 노모님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 내 어머니께서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후부터는 더욱 열심히, 거의 매일같이 저녁 무렵마다 백화산을 올랐습니다. 겨울로 접어들어서도, 눈이 내렸거나 몹시 추운 날에도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꼭 산행을 했습니다. 내가 등산을 하는 것은 내 건강을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나의 산행에는 어쩌면 기도 목적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 등산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84미터인 백화산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묵주기도' 10단을 할 수 있으니…. 집에서 가만히 정지한 상태로 기도를 하는 것보다 산을 타면서 (자못 역동적으로) 하는 기도에 나는 더욱 묘미를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묵주기도의 한 단은 내 어머니를 위해 바쳤습니다. 1단에서 5단까지는 오랜 세월 동안 '기도 지향'이 고정되어 있지만, 6단부터 10단까지는 수시로 기도 지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머니 수술 이후로는 늘 제6단을 어머니를 위해 바쳤습니다. "제 어머니 최오채 안나 님의 건강 회복과 만수 무강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라는 지향으로….

어머니를 위한 기도 외로, 묵주기도 제7단부터 내가 요즘 특별히 지향을 두는 이는 강원도 인제의 한 소년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본, 부모를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지뢰 폭발로 두 손과 한쪽 눈을 잃고 온 얼굴에 화상을 입은 16세 소년…. 지금도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 어린 아들의 처참한 불행에 머리를 쥐어뜯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기도가 그들에게 무슨 소용일지를 생각하면 더욱 막막해지는 심정이기도 하지만, 나는 참으로 아프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2월 1일) 또다시 대전성모병원에 갔다 왔습니다. 지난 달 18, 19일 '퇴원 후 1차 검진'을 받으신 내 어머니에 대한 '검사 결과'를 듣고 약을 타오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이 멀어 차 운전에 힘이 드는 데다가 거의 하루종일을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 아깝기도 해서 처음에는 대전에서 사는 막내동생에게 부탁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아직 방학 동안이라 동생이 집에 있을 것이기에….


그렇지만 약을 타기만 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검사 결과'를 듣는 일을 동생에게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가서 직접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온당한 일일 터였습니다. 혼자 먼길 운전을 할 때는 '고독'을 느끼는 내 심정을 살펴 주는 듯 고맙게도 아내가 동행을 해 주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는 말이라도 듣게 될지 몰라서 주치의 김지연 교수를 만날 때는 적이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X레이 촬영, CT촬영, 혈액 검사 등의 결과는 양호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만, 대변에 약간의 핏기가 비쳐서 3월에 변 검사만 다시 한번 해 보자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약은 이미 지난 달에 한 가지가 줄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원내 약국 앞에서 잠시 처방전을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기쁜 소리로 어머니께, 안양의 누님께, 둔산동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검사 결과가 좋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는 아내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아내에게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생 집에 들르지 못하게 된 사정을 동생에게 말하고, 돌아가는 길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중대한 일이 저녁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녀석이 저녁 미사에 최초로 오르간 반주를 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한결이가 가톨릭 성음악계에 공식적으로 데뷔를 하거든." 내가 동생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어린 아들녀석이 최초로 평일 미사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쉬지도 않고 길을 서두르는 내 모습에 나는 슬몃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년 전인 1999년 가을, 저녁 미사에 첫 복사를 서는 아들녀석을 보기 위해 충남문인협회 행사가 끝나자마자 전라북도 익산의 '나바위성당'에서부터 태안까지 조금은 과속으로 쉬지 않고 달렸던 일을 상기하자니 더욱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런 아비 심정으로 자식을 기르건만….
강원도 인제의 그 아버지의 심정은 지금….
아들녀석이 첫 복사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도 벌써 3년 전인 것처럼, 평일 미사에 최초로 오르간 반주를 하는 오늘도 금세 과거가 되어 버리겠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미사 시작 10분전쯤에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누나와 함께 일찌감치 성당에 와 있는 아들녀석은 오르간 앞에 앉아서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누나가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걸어서 오신 어머니도 약간 긴장하신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들녀석이 일찌감치 성인 미사에 오르간 반주를 하게 된 것은 인제 곧 중3이 되는 딸아이의 처지를 미리 감안하신 수녀님의 '계산' 때문이기도 하고, 딸아이의 강요도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평일 미사 반주를 했으니까 너도 그래야 혀" 하는 누나의 말에 녀석은 "난 아직 6학년이 아니야"라며 버텼으나 끝내는 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시작 성가와 마침 성가는 누나에게 맡기고 봉헌 성가와 성체 성가를 반주한 녀석은 몹시 긴장했던 탓인지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습니다. 나는 미사 후에 오르간 앞에서 일어선 녀석에게 다가가 살며시 안아주고 땀을 닦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잘했어.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집에 와서 아들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녀석은 미사 오르간 반주에 대한 부담감이 큰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번 격려를 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도전 정신과 자신감이 필요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사람에게 발전을 가져다주는 거야.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스스로 노력을 해야지. 그리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남들에게 봉사할 줄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남들에게 기쁨을 줄줄도 알아야 해. 미사에 가서 오르간 반주를 하는 것은 하느님께도 기쁨을 드리는 일이야. 미사 자체는 물론이고, 수많은 신자들의 신심과 기도를 도와 드리는 일이니 얼마나 값진 일이겠니. 그것은 너 자신에게도 가장 값진 기도일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하느님께서 잘 도와주실 거야."

녀석은 아빠 말을 알아들었는지 엷게나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녀석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가운데서도 기쁘고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이 참 기쁜 날이다. 할머니의 건강도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고, 한결이가 평일 미사 첫 반주도 멋지게 했고…."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한결이가 긴장을 해서 저녁도 잘 먹지 못했다니까, 맛있는 거 만들어 줄까?"

나는 그 순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가슴에 되새기며 혼자 가만히 성호를 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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