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제사 돌보는 다섯 명의 남자들

<참된 세상 꿈꾸기> 고맙고도 아름다운 풍경

등록 2002.02.08 11:25수정 2002.02.0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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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백화산에서 참으로 멋진 광경을 보았습니다.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내가 어제 백화산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광경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어제도 나는 저녁 무렵에 백화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오후 5시쯤 태을암 근처 너럭바위에 도착했지요. 맨손체조를 하고, 기구 위에 올라서서 허리운동을 하고, 바위 경사면에 '배 부딪치기'와 '등 부딪치기'를 하고 나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너럭바위 위를 거닐 때였습니다.

태을암으로 가는 길 어귀에 지프형 승용차와 작은 화물차가 와서 멎더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다섯 명이 내렸습니다. 태안 토박이인 나에게도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큼지막한 플라스틱 그릇을 들었는데, 음식 그릇들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너럭바위를 내려가고 오솔길 건너편 소나무들 사이의 펀펀한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바람이 닿지 않는 그 아늑한 곳에 둘러앉아서 술판을 벌이려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돼지 삼겹살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기에는 정말 좋은 장소였고 시간적으로도 적당한 때였습니다.

나는 다소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산에 와서 술판을 벌이는 것 자체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술자리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풍경을 보며 혀를 찬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공기 맑고 풍광 좋은 장소에 와서 술판을 벌이며 운치와 취흥을 즐길 줄만 알았지 저희들이 퍼질러 앉았던 자리 하나 말끔히 치울 줄 모르는 위인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탓이었습니다. 나는 또 한번 그런 부류의 인간들을 보게 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의 남자들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돗자리를 가져올 걸 깜빡 했다느니, 상(床)도 하나 싣고 왔더라면 좋을 뻔했다느니, 북향을 잡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이리저리 자리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더니 약간 경사진 낮고 판판한 바윗돌을 택했는지 그 위에다가 음식들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음식들은 가짓수가 많지 않았지만 정성 들여 준비한 것 같았습니다. 닭 백숙과 전, 떡, 과일 등속이었습니다.


"지금 제를 지내려구 그러남유?"
나는 너럭바위 가장자리에서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 그런디 준비가 부족헤 갖구 암만헤두 좀 어설플 것 같네유."

나는 서둘러 양말과 신을 신고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무슨 제사래유?"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친구 제사유."
"친구 제사?"
"작년 이맘 때 교통 사고로 죽은 친구가 있어서유. 그 친구가 총각으루 죽었거든유. 그래 갖구…."

한 사람이 납작한 돌을 하나 주워다가 놓더니 그 위에 소주잔을 놓았습니다. "얘는 술은 별루 좋아허지 않었는디…"하며 그는 소주잔에 술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담배를 피워 물더니 두어 모금 빨고는 불이 붙은 그 담배를 소주잔 옆에다 놓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살었을 때 담배를 많이 피운 모앵이구먼?"
"골초였으니께유."

그들은 근흥면 용신리 한 마을의 불알 친구들인 데다가 근흥초등학교 동창들이라고 했습니다.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지난 해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의 이름은 심의철이라고 했습니다. 화장을 한 다음 그 재를 백화산에다 뿌렸기 때문에 친구들이 백화산에 와서 제를 지내 주는 거라고 했습니다.

"절일랑 다 같이 한 번만 하자구."
"그려."
심의철의 다섯 명 친구들은 한 줄로 나란히 서서 합배를 했습니다. 재배와 반절을 하고 난 그들에게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오늘 이 제사가 처음 지내는 제사겄네요인?"
"그렇쥬."
"그럼, 앞으루두 해마다 친구 제사를 지내 줄 건감유?"
"그러야겄쥬."
"우덜 다섯 명이 다 늙어 죽을 때까지 총각으루 죽은 친구 제사를 지내 주기루 약속혔으니께유."
"그류이잉?"
"우덜이 작년부터 제사를 지내 주는 친구가 또 한 명 있슈."

그 친구는 백혈병으로 죽은 친구라고 했습니다. 처자가 있지만 아들이 너무 어려서, 그 아들이 열 살을 넘길 때까지는 친구들이 기일에 그 집에 가서 매년 제를 지내 주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음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음복까지 해야 제사가 제대로 되는 거라며, 그들은 내게도 음식을 권했습니다. 나는 술 한 잔을 마시며 하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저녁 무렵까지도 포근한 날이었습니다. 음복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 날씨에 우선 감사했고, 다섯 명의 착하고 따뜻한 가슴을 돌보아주시는 하늘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음복을 하며 그들과 좀더 얘기를 나누다보니 한 사람은 내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 가동 101호에 살고 있는 김아무개 씨의 친동생이었습니다.

곧 그들과 헤어져 먼저 산을 내려오는 내 가슴은 더없이 훈훈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그득 내 가슴에서 무놀졌습니다. 문득 심의철이라는 그들의 죽은 친구도 저승에서 나와 똑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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