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녀를 찾았습니다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3.20 13:56수정 2002.03.2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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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4시 45분쯤이면 뒷동에서 사는 제수씨가 우리집으로 옵니다. 그러면 나는 제수씨를 내 차에 태우고 태안초등학교 후문 앞으로 갑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리면 5시 퇴근 시간 1, 2분 전에 아내가 종종 걸음으로 나옵니다. 아내를 태우고 태안읍 변두리 평천리에 있는 자동차운전학원으로 달려갑니다.


5시부터 50분 동안이 아내와 제수씨의 기능 연습 시간인데, 5시 10분까지만 운전학원에 도착하면 됩니다. 10분까지는 시간 기록 컴퓨터가 연습 예약자들을 기다려 준다는군요. 10분이 경과하면 자동적으로 작동이 멈추고….

지난 1월 25일 자동차운전학원 등록, 2월 21일 학과시험 합격, 그리고 2월 25일부터 기능 연습을 시작한 아내와 제수씨를 운전학원에 태워다주고 태워오고 하는 일도 요즘의 나에겐 중요한 일과입니다. 덕분에 책을 좀 읽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책 읽는 시간이 너무 적은 것을 스스로 안타까워했는데, 아내와 제수씨가 운전 연습을 하는 1시간 동안 차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나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최근에 구입한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도 자동차운전학원 마당의 내 차 안에서 읽었습니다.

엊그제 15시간을 채운 제수씨는 16시간째인 어제부터 단독 승차를 하기 시작했고, 아직 강사와 동승을 하는 아내는 어제까지 12시간을 채웠습니다. 운전 연습을 같이 시작했는데도 두 사람의 연습 시간이 같지 않은 것은, 아내의 직장 사정 때문이랍니다. 퇴근 시간을 넘긴 학기초의 직원회의와 부장회의 때문이었지요. 다행히 사정을 아신 교장 선생님이 회의가 또 길어지게 되면 살그머니 먼저 나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셔서 현재로서는 별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곧 아내와 제수씨가 연습 시간 25시간을 채우고 기능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그리고 주행시험에도 합격을 해서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게 되면 차 안에서 1시간씩 독서를 하던 내 즐거운 시간도 끝이 나겠지요. 나는 지레 그것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물론 그런 생활이 무한정 계속된다고 하면 펄쩍 뛰겠지만….

그런데 며칠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한창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연습을 마친 아내와 제수씨가 와서 차 문을 두드리더군요. 두 여자는 운전 연습이 즐거웠고 뜻대로 잘 되었는지 싱글벙글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발그레해진 얼굴에는 땀도 맺혀 있는 것 같았고….


차 밖으로 나가서 수고했다는 말로 두 여자에게 격려를 해주는데, 웬 낯모르는 아가씨가 와서 말을 걸더군요.

"읍내로 가시면 같이 좀 타고 갈 수 없을까요?"
"읍내 어디로 가실 건데요?"
나 대신 아내가 물었습니다.


"터미널요."
"터미널이면 방향이 좀 다른데…."
그러며 아내는 내 눈치를 살폈습니다.

"터미널까지 돌어서 가기가 좀 그러네."
내가 난색을 보이자 그 아가씨는 실망한 표정으로 곧 말없이 몸을 돌리더군요.

곧 아내와 제수씨는 차에 오르고, 나는 차 안에 두었던 쑥개떡과 누릉지를 꺼내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다 저녁때라 뱃속도 출출할 테고, 운전 연습을 하고 나면 기운도 빠질 거라면서 어머니가 며느리들을 생각해서 차 안에 넣어준 간식거리였습니다. 두 여자는 기쁜 표정으로 어머니께 감사하며 쑥개떡과 누릉지 그릇을 받아들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달리는 차 안에서 아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평소의 당신답지 않네요. 차 태워달라는 사람헌티 거절을 다허구…. 한 번도 그러신 적 없잖아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쿵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생각헤두 오늘은 내가 좀 이상헌디…."
"왜 그러신 거예요? 터미널루 돌어서 간다구 헤두 그렇게 먼 거리두 아닌디…."
"글쎄, 내가 왜 그랬을까? 암만헤두 내가 오늘 실수를 헌 것 같은디…."

나는 잠시 후에 다시 말을 내었습니다.
"암만헤두 쑥개떡이랑 누릉지 때문이었던 것 같어. 운전 연습을 마치구 집에 가면서 차 안이서 쑥개떡이랑 누릉지 먹는 맛이 얼마나 좋겄나. 그런디 쑥개떡이 두 개배끼 읎구 헤서, 그 아가씨를 태워주면 뭔가 방해가 생길 것 같어서…. 그런 생각 때문에 내가 그 아가씨를 태워주지 않은 것 같어, 암만헤두…."
"어이그, 당신두 참…. 그 아가씨랑 조금씩 나눠 먹으면 될 텐디…."
"그러게 말여. 내가 왜 그 생각을 뭇헸을까? 그랬더라면 그 아가씨가 우리헌티 더 고마워 헐 텐디…."

참으로 후회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누군지 모를 그 아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며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마음이 정말로 한량없었습니다.

"혹시 그 아가씨가 여기에 이렇게 매달아놓은 십자가를 보지는 않었을라나? 이 천주학쟁이 표시를 보았다면 속으루 숭을 볼 지두 물러. 안 그려?"
"그 아가씨가 그것까지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설령 보았다구 헤두 그런 생각까지 허겠어요? 그런 걱정일랑 말어요."
"그래두…. 이거, 내 맘이 이응 불편허게 생겼는디…. 지금 차를 돌릴 수두 읎구…."
"그만 잊어요. 그렇게 큰일은 아니니께요."

그러나 그것은 내게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집에서도 그 상황을 어머니께 설명하고 후회를 거듭했습니다. 어머니는 사람이 대범하지 못하게 그까짓 일을 가지고 그렇게 후회를 하느냐며 오히려 내게 핀잔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대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을 쉽게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나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부터 나는 자동차운전학원 마당에 머무르는 동안 차 안에서 독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 건물의 현관과 사무실, 그리고 교습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그 아가씨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가씨의 얼굴을 명확히 떠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쯤의 머리칼이 긴 아가씨였다는 것만 겨우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저, 혹시 어제 내 차를 타구 싶어헌 아가씨 아닌감유?"
이렇게 두어 명 아가씨에게 슬며시 묻기도 했습니다.

이상하게 그 아가씨를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십중팔구는 이 시간대에 연습을 허는 학원생일 텐디…다시 만나는 일이 별루 그렇게 어렵지가 않을 텐디…하는 생각을 골백번도 더한 듯싶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제 그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학원 건물 현관에서 머리칼이 긴 아가씨를 보는 순간 그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내게 야릇한 설렘과 반가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번이 읍내 터미널꺼지 내 차를 탔으면 헸던 그 아가씨 맞지유?"
"태안문학이라구 쓴 승합차 말인가요?"
"그러니께 날 기억허는구먼유?"
"예."
그 아가씨는 좀 멋적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날 참 미안헸슈. 미안허다는 말을 허구 싶어서 내가 며칠째 아가씨를 만날라구 헸는디, 오늘서야 만났네유. 증말 미안휴."
"괜찮아요. 그런 일이 뭐가 그렇게 미안허대요?"
그러며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그런디 왜 며칠이나 뵈지 않었대유?"
"예.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며칠 쉬었거든요."
"아, 그랬구먼유…. 이렇게 다시 나오셔서 아주 고마유. 언제까지 운전학원일 다니실 지는 물르겄지먼, 열심히 연습 잘헤 갖구서 면허 꼭 따세유. 그리구, 내 차 신세를 지실 일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구 내 차루 오시유. 허허허."
"전 다섯 시 삼십 분에 나가는 학원 차를 이용해요. 그날은 학원 차를 놓쳐서 그랬구요."
"다섯 시 삼십 분 학원 차를 또 놓치게 되면 그때는 나헌티 오라구요."
"그럴 게요."

또 하루 운전 연습을 마친 아내와 제수씨를 내 승합차에 태우고 돌아오면서 나는 그 아가씨를 만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요? 이제부터 당신 마음이 편허시게 됐네요."

아내도 제수씨도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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