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론, 철 지난 허깨비 춤을 보며

등록 2002.04.02 12:23수정 2002.04.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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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 나라의 월드컵 축구 대표팀의 경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붉은 악마'라는 이름의 응원단의 존재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붉은 악마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우리 축구 대표팀을 열광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응원하는 젊은이들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2002년 월드컵 대회 개최 국인 우리 나라가 16강 진출의 숙원을 풀기 위하여 절치부심하고 있는 지금, 붉은 악마는 없어서는 안될 참으로 귀중한 존재이다. 붉은 악마들의 극성스러울 정도로 열렬한 응원 모습을 보면서 우리 젊은 한국인들의 무한한 '동력'을 실감하는 것도 축구 경기 못지 않게 즐거운 일이다.

붉은 악마라는 애칭이 언제 누구의 제안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빨간색 유니폼 착용과 연관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의 빨간색 유니폼은 근거가 있을 듯싶다. 우리 나라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은 주로 빨간색이었다. 저 60년대부터, 우리 나라 축구가 아시아권에서는 최강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부터 빨간색 유니폼은 우리 대표팀의 거의 전통적인 유니폼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나는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 그리고 색깔론이 맹위를 떨치던 때 축구 대표팀의 빨간색 유니폼과 연관하여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사물의 빨간색에서 알레르기를 느끼는 사람들과 빨간색 페인트 통을 보검처럼 손에 쥐고 사는 사람들이 왜 축구 대표팀의 빨간색 유니폼을 못 본 척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지금도 일정 부분은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오늘날 축구 대표팀의 빨간색 유니폼과 붉은 악마 응원단의 빨간색 유니폼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의 명칭을 문제 삼는 사람은 있는 것 같다. '붉은'이라는 색깔 쪽으로는 별 문제 제기가 없는 것 같은데, '악마'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끈덕지게 문제를 삼고 있는 사람을 본다. 개신교 계통의 한 웹사이트에서 목사라는 분의 글을 읽었는데, 비분강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의 명칭을 당장 바꿔야 한다는 논지였다.

하지만 그 목사님이 아무리 개탄을 하고 염려를 한다 해도,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에게서 '악마성'을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마의 본질을 흐려놓고 악마에 대한 바른 인식과 경계심을 마비시키는 짓"이라는 견해가 일견 그럴 듯하기도 하지만, 그 목사님의 글이 조금도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글이 이 세상의 보편 상식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한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의 명칭에 대해서, '악마' 쪽으로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생겨났으니, 누군가가 '붉은'이라는 색깔 쪽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장과 죽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색깔론의 기수 조선일보가 수행한다면 모양새가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자니 조선일보가 왜 가만히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르면 몰라도 조선일보는 '붉은'이라는 색깔로부터 내부적으로는 심한 알레르기 증상을 겪고 있을 텐데 왜 그것을 표출하지 않는 걸까? 시비를 걸고 문제를 제기해 봐야 별 실효가 없을 거라는, 실리를 잴 줄 아는 계산 능력의 작용 탓일까? 실리를 추구하자니 수십 년 동안 간직해 온 페인트 통을 사용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얼마나 클까?

색깔론이라는 보검으로 신문의 위력을 맘껏 발휘하며 이데올로기의 아성을 쌓아온 조선일보가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를 보는 각도에서는 '관성의 법칙'을 자제하는 듯한 모습이 내 눈에는 신기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붉은 악마의 '악마'를 문제 사는 목사님도 생겨나는 판국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최근에 조선일보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색깔론이 다시금 기승하는 현상은 자못 흥미롭기까지 하다. 어떤 이는 색깔론의 출몰에 대해 '색깔론의 망령'이라고 제법 대접을 해 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 유치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 후보가 상대 후보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색깔론을 '조·중·동' 보수 언론들이 그럴 듯하게 치장을 해 주면서 옛날처럼 맘껏 쌍나발을 불어댈 태세이긴 하지만, 그것은 천박한 그들 수준의 적나라한 노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색깔론을 보면서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의 이름에 대해 시비를 하고 나선 그 용맹한 목사님을 떠올렸다. 그가 아무리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붉은 악마의 이름 바꾸기를 주장한다 해도, 그것을 옳게 귀담아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찬가지다. 한 후보가 아무리 색깔론을 주장하고 보수 언론이 맞장구를 치며 옛날로 돌아가기를 기를 쓰고 소원한다 해도, 세상은 옛날처럼 그렇게 호락호락 속아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의 이름 바꾸기를 주장하는 그 목사님하고나 손뼉을 맞추는 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색깔론이 만병통치약이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가를 색깔론의 투사들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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