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자들이 누리는 특권(!)

<귀농일기> 봄 소낙비속의 '의식혁명'

등록 2002.04.17 21:13수정 2002.04.1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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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오가는 소리는 참 다양합니다. 대개는 따뜻한 봄날 생동하는 새 생명으로 다가옵니다. 아찔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어떤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보통의 일상 생활을 흔들어 대면서 사랑은 대개 그렇게 옵니다. 그러나 우당탕탕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멀어져 가기도 합니다. 난데없는 돌변에 당황스러움과 황당함이 역시 일상의 균형을 모조리 짓이겨 놓기도 합니다. 사랑의 여파가 오랜 여진을 남기기도 합니다.


새벽잠을 깨운 소낙비

야밤 도둑처럼 소리없이 내 속으로 푹 스며든 책 한권이 있습니다. 이 한 권의 책.

어제 새벽 3시경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남부지방의 집중호우로 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생난리를 치고 나서 하루 종일 창가에서 오락가락 하는 봄비를 내다보며 읽은 책입니다. 거센 바람을 동반한 빗줄기가 황토벽을 타고 흘러 내리길래 지붕위에 맨발로 올라가서 비닐로 벽을 가리고 또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돌려내야 하기 때문에 뒤안의 물꼬를 다시 파냈습니다. 황토집에 비는 치명적입니다. 작년에 발수제를 벽 아랫쪽만 뿌렸는데 비가 내리치니 윗 벽을 처마가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동안 다 읽은 책은 '의식혁명'. 이 책은 지난달 미국서 돌아온 어느 큰스님께 인사 갔다가 점지 받아 온 것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책입니다. 무의식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근원의식'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서 라고 하는 게 좋을 책입니다.

에너지 레벨 500으로 측정되는 사랑에 대한 실험이 참 재미있습니다. 보통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육체적 매력이나 소유욕, 탐닉, 통제, 질투, 에로티시즘, 신선함 등 매우 격렬한 정서들이 결합되는 것으로 상식화되어 있지만 죽고 못 살 것 같은 이러한 '사랑'이 한 순간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동안 숨겨져 있던 노여움이 폭발하고 불같은 질투가 노골화되는 것이 한 순간이라는 지적은 너무 옳습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 나아가 그대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수긍이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하게 자라나지 못하고 얼마나 의존적이었던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상대의 특정한 측면에 의존했다기보다 상대에 대한 자기의 기대와 요구에 의존했던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유욕과 간섭과 질투를 마치 사랑의 징표처럼 간주하는 편견들이 많습니다.

단숨에 읽은 한권의 책


장마철 소낙비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드디어 장독대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치독에 물이 들어갈까봐 급히 임시 둑을 쌓았습니다. 역시 작년, 한해동안 집 짓는데 지쳐 장독대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탓입니다. 마당에서 패다 놔 뒀던 장작은 벌써 비를 맞았지만 아랫방 부엌께로 끌어 들였습니다. 집 왼쪽 처마밑에 쌓아 둔 장작더미에도 비가 뿌리치고 있었습니다. 비닐이랑 합판으로 빗줄기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완벽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옷을 입었었지만 옷은 이미 다 젖었고 장화에도 물이 가득 찼습니다.

괭이랑 삽을 메고 급히 밭으로 나갔습니다. 빗물로 범벅이 된 안경이 내 콧잔등에서 자꾸만 흘러 내렸습니다. 벌써 밭 골에 빗물이 찰랑거리고 있었습니다. 땅은 공기와 수분과 유기물, 이 세 가지가 알맞게 섞여 있어야 농사가 잘 됩니다. 섞여 있는 비율에 따라 각기 합당한 작물이 있게 마련이고 또한 흙이 차진지 거친지에 따라 잘 자라는 작물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밭이 물에 잠기게 되면 작물의 뿌리가 질식하고 병충해가 극성을 부리므로 소낙비가 쏟아지면 얼른 밭 뒷도랑 물꼬를 내 주어야 합니다.
옆집 기정이 할아버지와 어둑어둑한 밭둑길에서 마주쳤습니다. 어허 참 어허 참 하면서 분주하십니다.


홉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흔하게 듣는 얘기라서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홉킨스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의 근원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기 때문에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을 갖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 내부의 크나큰 동기에 뿌리를 두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과 동기를 고양시켜 줌으로써 자기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홉킨스가 말한 사랑의 특징 중 '사랑의 전체성'이 제일 감명 깊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어떤 장애물도 철거하며 어떤 부족함도 견디며 늘 '전체'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항상 한 사람의 전모를 볼 수 있다면 감정의 오르내림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에는 조건보다 수용이 선행합니다. 사랑은 자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사랑은 감상의 소산이 아닐 것입니다.

도시 비와 시골 비

빗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이 샐 때까지 집 주변과 밭을 단도리 하는 동안 옷을 뚫고 스며 든 빗물이 온 몸을 적시고는 등골과 겨드랑이, 사타구니로 흘러 내렸습니다. 날씨만 궂어도 집안에 치울 게 없나 괜히 집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의 집까지 기웃거려 줄 정도입니다.

베란다에 나와 서서 시원스레 내려꽂히는 빗줄기를 감상하며 막걸리 한잔 떠올리던 아파트 생활이 불쑥 생각났습니다. 더우면 더위와, 비라면 비로 살아가는 시골은 정녕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더위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된 것은 어쩌면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날씨와 기후의 영향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농부는 사랑입니다.

'의식혁명'에서는 사랑으로 사는 삶의 전형이 참된 농부라고 말 한 적이 없습니다. 홉킨스도 보지 못한 것이 있나 봅니다. 이 세상 어느 농민도 갑자기 쏟아지는 봄 소낙비 때문에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둑 터질까 미리 물꼬 내고 마당에 널어 뒀던 채반지 묵묵히 끌어들일 뿐임을. 스스로는 젖을지언정 젖지 않아야 할 것을 감싸 들일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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