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큰 생일 선물은 없어!"

되돌아온 사랑의 부메랑

등록 2002.04.19 11:42수정 2002.04.1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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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실 책 정리를 끝내고 막 나가려는데 작년 우리 반 반장이었던 현주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저와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있는지 표정이 평소와는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학교 등교길이나 시내에서 만나면 뚝배기 깨지는 특유의 탁음으로 "자기!"하고 저를 부르곤 하여 군밤을 얻어먹기도 했던 아이가 새색시 같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저, 선생님…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생일도 못 챙겨 드리고…선생님, 늦었지만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리고 이거…"

현주가 내게 내민 것은 한 장의 얇은 책받침이었습니다. 책받침 앞면에는 35명의 아이들이 깨알같이 적어놓은 생일 축하글이, 뒷면에는 소녀 시인 보람이가 지은 생일 축하시가 작고 단정한 글씨도 예쁘게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생일 때마다 전해주곤 했던 마음의 선물을 이번에는 제가 아이들부터 그 방식 그대로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그 뜻밖의 선물에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잃고 서 있는데 현주는 그런 제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말을 덧붙입니다.
"다른 선물은 준비 못했어요. 죄송해요 선생님."
"죄송하다니, 이보다 더 큰 생일 선물은 없어."

며칠 전에는 지금 담임 반 아이들로부터 한 권의 편지를 받고 가슴이 뭉클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교육적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제 생일을 알려주긴 했지만 혹시라도 부담을 가질까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편지라고만 말을 했던 것인데 반 아이들이 한 권의 공책에 가득 편지글을 적어 저에게 선물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5교시 수업을 끝내고 돌아와 울긋불긋한 색상의 고운 그림들과 함께 한 장의 종이에 비좁도록 가득 채워놓은 아이들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먼저 쓴 아이들이 너무 길게 써서 그랬는지 몇 아이는 글을 남길만한 자리를 찾지 못해 이리 저리 헤맨 흔적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구석구석에 박힌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일망정 미처 다하지 못한 말까지도 저는 충분히 읽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남발(?)한 사랑이라는 단어와 울긋불긋 그려놓은 사랑의 하트 표시도 소녀 특유의 수채화 같은 감상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와 하트 모양은 같아도 아이들의 이름에 따라 그 사랑이 전해오는 체험의 깊이와 느낌이 모두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화려하거나 달콤한 것만이 아닌, 그 안에 어떤 힘과 용기가 내포된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선생님, 저 은희예요. 작년에는 선생님께서 저희한테 생일 축시와 함께 써주셨는데…작년 1학년 2반이 너무 그리워요. 매보다도 사랑으로 감싸 주셨던 선생님 정말 잊지 않고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생신 축하드립니다. ♥사랑해요♥

선생님, 저 척추 범희에요. 먼저 선생님 생신 추카드려요. 1년 동안 제 척추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졸업하고 커서도 선생님 잊지 못할 거예요. 선생님도 저 잊으시면 안 돼요. 선생님, 사랑해요~ 알라뷰♥


선생님, 저 다정이에요. 우선 생신을 너무 축하드려요.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보냈던 1년을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다시 1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럼 말썽 안 피우고 정말 잘 할 수 있는데...선생님 얼굴에 미소 짓게 하기보다 속상하게 해드린 게 너무 후회스러워요. 선생님 작년 1학년 2반 꼭 잊지 마세요. 사랑해요!!

선생님! 저 이쁜이 송이요. 저희 생일 때마다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생일 축하시를 써 주셨는데 저희들은 선생님의 생일이 한참 지난 뒤에야 준비하고 있네요. 2학년에 올라와서 1학년 때 선생님이 주신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 와서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리고 ♥사랑해요~~

Love하는 선생님... 저 경화예요. 우선 생신 정말 축하드려요. 요즘 들어 계속 선생님의 사랑이 그리워요. 항상 선생님의 은혜 잊지 않을게요. 선생님 Love♥ 해요.

♥살랑하는 통탱님~ 미진이가 늦게나마 올 샘의 생신을 추카드릴려구 이렇게 글을 올려요. 지난 1년 동안 올바르게 키워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할게요.

선생님, 저 전학 온 윤진...아시죠?! 생신 축하드려요. 1학년 때 넘 잘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저 잊지 못할 거 같아요. ♥알라뷰!

존경하는 아버지께. 저 보람이에요. 부족하지만 시 하나 지어보았어요. 늦었지만 생신 축하드려요. 사랑해요. 선생님!


보람이는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누구보다도 가슴앓이를 많이 했던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저와 텔레파시가 통하는지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메일 편지를 보내와 저에게 힘이 되어 주기도 한 아이입니다. 보람이와 제가 주고받은 메일 편지만 묶어도 작은 책 한 권이 될 정도입니다. 그 중에는 이런 편지도 있습니다.

이제는 보람이에게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아요. 자신이 없어요. 이제 선생님 옆에 든든한 딸이 되긴 틀렸어요. 오늘 학교 가고 싶었어요. 아침에 꼭 전화하지 않아도. 내 맘이 변해서. 학교에 간다면 선생님이 어제 흘린 제 눈물 때문에 이해해주실 거라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쩌면 선생님이 저를 포기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에 수화기를 들었어요. 아주 조심히 번호를 눌렀는데.

어제 선생님의 그 눈빛이 생각나고 아빠에게 혼나는 모습 같아서 전화하면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애써 담담한 척 했는데 결국은 선생님께 변명 한번 제대로 못하고 끊었어요. 어제 운 것도 있고...어제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해서 집밖에서 오랜 시간 동안 돌아다녔어요. 그래서 몸이 많이 상했어요. 이제 이런 변명도 속내도 이제는 선생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내일 선생님을 어떻게 뵐까요...

- 보람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한 거니? 넌 조금 잘못한 것 뿐이야. 아주 조금...아주 아주 조금.. 보람아, 지금도 넌 내 보람이야. 너처럼 선생님을 깊이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깊이 안아준 아이는 아직 없었어. 그런 너를 포기하다니? 널 미워하다니? 말도 안 돼. 넌 누가 뭐라고 해도 아름다운 아이야. 사랑하는 내 딸이고... 오히려 어린 너에게 주어진 짐들이 어른으로서 늘 미안한 마음뿐이란다.

보람아, 아무리 불행한 생각이 들어도 네 스스로 불행하다고 인정해서는 안 돼. 그것은 네게 아름다운 성품을 주신 하나님께 도리가 아닐 듯 싶구나. 그리고 아주 작지만,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하는 이 부족한 담임선생님도 있잖니? 무엇보다도 네가 보고싶구나. 아주 많이… 사랑한다, 보람아..너무 힘들어하지 말기 바란다. 그럼 곧 만나게 되길...


다음은 작년 유통관리과 1학년 2반 아이들을 대표해서 부족한 담임을 위해 보람이가 지은 생일 축하시입니다. 이 시의 주인공이 다른 분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요즘 아이들이라고 싸잡아 욕하고 아이들의 진실과 사랑을 너무도 과소평가하는 분들도 함께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망설임 없이 시를 올립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아버지…

당신은 따뜻한 아버지이십니다
따가운 회초리 한 대보다
애써 꺼낸 미소로 마음 다 하시는 아버지…
힘든 하루 뒤에도 아버지를 보러 찾아나선 까닭은
그 미소 때문이 아닐런지요

당신은 대단한 아버지이십니다
피곤에 지쳐 있어야 하는 시간에도
나이만큼이나 많이도 쳐져버린 어깨를 지고서도
35명의 작은 손, 맑은 눈이 그리워
어느 새 18세 소년인 만냥 씩씩하시던 아버지…
그 모습은 사춘기 어린 소녀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가 아닐런지요

당신은 냉정한 아버지이십니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서운하고 지난날을 그리워해도
시원치 않을 마음…사랑을 감추시는 아버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나 못할까
매일 그립다고 게으름만 피울까 걱정하는 그 마음을 아직 다
모르는 이유가 아닐런지요

당신은 소중한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가끔은 모른척하며 지나쳐버릴 것도 같은데
깜박 잊고 무관심하게 살아갈 것도 같은데
당신을 보면 눈 한 번 더 맞춰 보여드리고 싶고
어린애처럼 달려가 꼬옥 안아 드리고 싶은 아버지…
이 모든 마음이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아버지께 배워온 사랑이 아닐런지요.

2002년 4월 10일, 사랑하는 안준철 선생님께
유통 1학년 2반 35명의 딸들이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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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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