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어머니, 그 강하고 넓은 품

영화 속의 노년(32) -〈안토니아스 라인〉

등록 2002.06.09 06:50수정 2002.06.0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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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은 여인 5대로 이어지는 긴 가족사가 넓은 땅과 함께 펼쳐지는 영화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딸 다니엘을 데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안토니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에는 안토니아와 다니엘 둘만 남는다.

굵은 허리에 두리두리한 몸매를 한 아줌마 안토니아는, 평생 성적 방종으로 고통을 준 남편을 원망하고 욕하며 숨을 거둔 어머니와 달리 결혼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웃집 농부 바즈의 구혼도 물리치고, 여러 이웃들과 어울려 씩씩하게 살아간다.


미술학교에 입학한 딸 다니엘이 결혼은 싫고 아이만을 원한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는 것을 도와주어서 아이를 갖도록 한다. 태어난 손녀 테레사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 성폭행의 아픔을 겪고 방황하지만 결국 오래 곁에서 지켜준 마을 친구와의 사이에서 딸 사라를 낳는다. 그러니까 사라는 안토니아에게 증손녀, 이렇게 해서 여인 5대를 이루게 된다.

마을에서는 쉬지 않고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 모든 것을 지켜 보며 끌어안는 안토니아는 '사는 게 인생이며, 인생은 살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증손녀 사라에게 이야기한다. '이 춤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라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자신의 마지막 날을 예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많이 든 안토니아가 이제 죽음을 느끼며 준비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불러모아 다가온 죽음을 알리고, 눈감은 채 죽을 준비를 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죽음이다.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기계 장치를 달고 문 밖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 모두가 꿈꾸는 마지막 모습이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러나 끝나지 않는 인생. 그래서 인생은 누군가 떠난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하나로 이어지게 처리해서 나타내고 있다.

안토니아에게 이웃 농부 바즈가 '내 아들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 청혼을 한다. '난 아들 따위는 필요 없다'는 안토니아의 대답. 오히려 되묻는다. '왜 남편이 필요하죠?' 두 가족은 종종 식사를 같이 하며 친숙한 이웃으로 지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안토니아는 바즈에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시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이 아닌 제3의 장소를 고른다. 숲 속의 오두막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등불 하나 손에 들고 떠나는 두 사람. 안토니아의 딸과 손녀가 배웅한다.

각자 자기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한 식탁에 온 가족이 마주 앉고, 필요할 때는 제3의 장소에서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동거에 대해서 단순한 성적, 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출구냐, 수많은 결함과 문제를 안고 있는 결혼 제도에 대한 대안이냐 하는 논의가 무성한데, 안토니아와 바즈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노년의 사랑과 결혼을 생각해 봐도 안토니아와 바즈가 하나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노년의 사랑과 결혼이 호적 문제, 재산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데, 각자 자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둘 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물론 한 쪽이 병에 걸리거나 세상을 떠났을 경우를 예상해서 분명한 약속들을 하는 것이 앞서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안토니아는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하고 건강하다. 그리고 넓다. 몸담아 살고 있는 땅을 닮았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주는 땅의 얼굴이다. 큰 나무를 닮았다. 저 땅 끝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서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생명을 묵묵히 지켜 보는 나무의 모습이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빼고 여인 4대가 남자에 매이지 않고 생활해 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신선하다. 유쾌하기도 하다. 물론 폭력으로 상하는 어린 영혼의 이야기는 눈물 겹기도 하지만, 주변 남자들의 폭력과 오만, 위선 등이 깨져 나갈 때도 가끔은 웃음 짓게 하는 여유가 있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니 동거의 한 방식이니 하는 논의에서는 비껴간다 해도, 구원은 결국 여성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소리 높이지 않고 말하고 있다. 여성 영화이기도 하지만 노인 영화인 것은 자연과 함께 나이들어 가는 안토니아가 그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 주기 때문이다.

(Antonias 안토니아스 라인 / 감독 마린 고리스 / 출연 윌케 반 암멜로이, 앨즈 도터만즈, 얀 데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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