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妄스? 로망스! 만화 속 노년 이야기

책 속의 노년(31) :〈로망스〉

등록 2002.07.13 16:07수정 2002.07.1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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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정 부모님댁에 두 아이를 맡기고 갑작스레 외출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귀찮게 할까 싶어 만화 비디오 한 편을 손에 들려 보내면서, 조용히 잘 놀아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정확하게 1시간 30분 동안 일을 보고 돌아오니 밤 9시 30분. 애쓰셨다는 인사를 드리고 두 아이 데리고 돌아오는 길, 둘 다 입이 이만큼 나와서 투덜투덜이다. 비디오 테입 보고싶다는 말에 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 드라마 봐야 하는데…" 하시더란다.


드라마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두 아이, 드디어 드라마가 끝나서 텔레비젼 앞으로 다가앉으니 "9시 뉴스 봐야 된다. 만화는 이따가 너희 집에 가서 봐라" 하셨단다. 다른 놀잇감도 없고 해서 조용히 앉아 지루한 뉴스를 참다보니 엄마가 온거란다.

어른이 보고 싶은 것 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철없이 조르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등등으로 우선 아이들의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는 엄마의 잠깐 외출일 경우 다음부터는 외가집에 갈 것 없이 문 잘 잠그고 둘이 집에 남아서 노는 게 좋겠다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 '아버지가 정말 변하셨구나.' 언제나 손자, 손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당신 마음을 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인 친손자들이 다니러 오면, 당구장에 데리고 가서 같이 포켓볼도 치시면서 아이들 기분 맞춰주고 이야기를 해보려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사람은 변한다는 말을 참 많이 한다. 그 변화가 부정적이어서 고개를 돌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그야말로 나이들어감이 가지는 최대의 미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막상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은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태호의 만화〈로망스〉를 보면서 이 만화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주책맞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도 올해 80세이신 내 아버지의 변화와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딸 둘, 아들 하나를 모두 출가시키고 아내와 함께 사는 퇴직 공무원 김이용 할아버지, 월남전에서 날고 기었다는 파랑새 할아버지, 손자보러 '너 누구냐?'를 자꾸 묻는 치매기가 있는 할아버지, 거기다가 열쇠 할아버지와 은퇴 조폭 할아버지까지 주름 가득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 만화책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노년기의 신체적인 변화에서부터 일상 생활, 가족과 자녀를 포함한 인간 관계, 노년기의 성(性)을 거의 같은 분량으로 다루고 있고, 그 밖에 치매라든가 과거의존적인 노인의 특성, 경로당 풍경들을 손에 잡힐 듯 담아내고 있다.


슬쩍 흘러나오는 침에서부터 외출할 때 기저귀를 차야 하는 요실금, 변비, 식사할 때 자꾸 음식을 흘리게 되는 것까지 신체적인 변화를 짤막하고도 분명하게 잘 나타내고 있고, 노년기의 성(性)과 관련해서는 '늙어봐라'라는 제목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을 뿐이지 그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이 만화들이 스포츠 신문 연재 만화였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이들을 겨냥하고 만들어지는 신문에 노인을 그린 만화를 싣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스포츠 신문의 선정성에 기대어 노년의 성(性)을 일부러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 탑골 공원에 모인 노인분들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휴대폰을 자랑하다가도 막상 벨이 울리면 받을 줄 몰라 벨소리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들은 만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유머를 담고 있다.

노인문제를 소리 높여 외치는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쉽게 노인분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앞으로 이 만화가 좀 더 이어졌으면 좋겠고 아울러 노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조연 아닌 주연의 위치에서 만화 속 할아버지들과 함께 노년의 삶을 꾸려갔으면 좋겠다. 정말 이제는 만화도 노년을 이야기하는 때가 왔다.

(로망스, 윤태호 지음, 애니북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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