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 조직에 몸담은 두 아버지의 삶

영화 속의 노년(41) - <로드 투 퍼디션>

등록 2002.09.13 18:03수정 2002.09.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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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들은 오늘도 탑골공원 담을 따라 줄을 서 계신다. 차례대로 받은 식권 한 장을 손에 쥐고 아버지들은 몇 걸음 떨어진 건물 2층에 있는 '노인무료급식소'로 향하고, 식사할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또다시 줄을 서 계신다.

영화 속에는 두 아버지가 있다. 갱 조직에서 일하는 마이클 설리반과 조직의 보스인 존 루니. 마이클에게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데, 믿음직한 남편이며 듬직한 아빠다. 머리가 하얀 노인인 존은 아들 코너를 데리고 일을 해나가고 있다.


고아인 마이클을 어려서부터 돌봐준 존은 마이클에게 아버지같은 존재고, 마이클의 아들들 역시 존 할아버지를 스스럼없이 따른다. 존의 친아들 코너는 아버지가 신뢰하는 양아들 마이클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곤 한다.

어느 날, 조직에 의해 마이클의 아내와 작은 아이가 목숨을 잃게 되고 마이클은 살아남은 큰 아이와 함께 복수의 길에 접어든다. 한편 존은 마이클의 복수로부터 친아들 코너를 지키기 위해 마이클의 목숨을 노리게 된다.

마이클의 어린 두 아들은 늘 아빠의 직업이 궁금하다. 엄마는 그저 "너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일을 하신다"고만 답해줄 뿐이다. 깔끔하고 단정한 아빠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들어선 길이라 해도 아들은 결코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라는 아빠. 조직으로 인해 아내와 어린 자식이 목숨을 잃고, 큰 아이와 함께 쫓기게 된 아빠의 마음 속에서는 어떤 생각들이 오갔을까.

마이클의 두 아이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할 때는 한없이 다정하고 푸근한 할아버지이지만, 갱 조직의 보스로 돌아가면 철저히 냉정해지는 존. 친아들을 위해 양아들을 포기하는 그 역시 한 사람의 나약한 아버지였다. 자신의 길을 같이 걸어가고 있는 아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양아들 마이클과 마지막으로 마주한 존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린다. 하얀 머리, 주름으로 늘어진 양볼, 호물호물한 입. 죽음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친아들과 양아들을 생각하며 혹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 것은 아닐까.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고, 너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며 지켜온 것들이지만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평생 갱 조직을 이끌어 온 존의 노년은 과연 무엇으로 기억될까.

누구에게나 노년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남는지도 모르겠다. 후회와 회한으로 돌아본들 지나가버린 시간은 결코 뒤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젊은 아빠보다 인생의 마지막 언덕에 서 있는 나이든 아버지가 눈에 밟히는 것은, 노년에는 누구나 그 살아온 인생길이 훤히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클과 존이 어떤 사람으로 남든 마이클의 아들에게도, 코너에게도 그들은 그저 아버지였을 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내일도 여전히 탑골공원의 담을 따라 줄을 서실 것이다. 그 분들 노년의 긴 그림자를 볼 때마다 막막해지기에 차라리 외면하고 싶기도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우리가 그 분들 걸어오신 길을 눈여겨봐드리는 것만으로도 조금 위안을 받으실 수 있을까 모르겠다.

(로드 투 퍼디션 Road to Perdition / 감독 샘 멘데스 / 출연 톰 행크스, 폴 뉴먼, 주드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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