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넘어서…

영화 속의 노년(42) -〈YMCA 야구단〉

등록 2002.10.04 10:48수정 2002.10.0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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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늘 말씀하신다. 선비는 학처럼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이제 조선땅에서 더 이상 학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한탄하시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형은 의병이 되겠다고 집을 떠난 후 소식이 끊겼고,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가 되고 싶었던 나의 꿈은 과거제도의 폐지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차고 놀던 돼지 오줌보 축구공이 어느 집의 담장을 넘어가버려 그 집으로 공을 찾으러 간 선비 호창은, 야구를 하던 선교사들을 보게 되고 결국 신여성 정림의 권유로 조선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원이 된다.


양반과 상놈, 일본 유학파와 친일파의 아들, 선비, 신여성, 쌍둥이 아이들. 이들이 모였으니 그 좌충우돌이야 짐작이 가는 바이고, 조선 천지에 처음 소개되는 스포츠이니 장비에서부터 용어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발하고 재미있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근본없는 사람들까지 나댄다고 못마땅해 하시는 아버지의 눈을 속이며 호창이 야구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 관중들 사이에 서 계신 아버지를 발견한 사(士)번 타자 이호창 선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기도 하고 방망이로 얼굴을 가리고 뱅뱅 돌기도 한다.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 운영하던 서당을 물려 받으라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야구라는 보도 듣도 못한 운동에 빠져있는 아들을 향해 가차없이 바둑돌이 가득 든 통을 날리고 다시는 아버지라 부르지도 말라며 등을 돌리신다.

일본의 압력이 점점 더 거세지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친일파에 대한 테러가 일어나면서 YMCA 야구단도 해체되고 만다. 낙심한 선비 호창은 낙향해서 아버지의 서당일을 돕는 훈장이 된다. 어느 날, 읽을거리가 제법 있다며 아버지가 내미시는 황성신문. 거기에는 YMCA 야구단이 일본군 야구팀과 재대결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선비는 학처럼 살아야 한다며 당신 자신이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고 계신 아버지. 학문으로도, 마음에 품은 뜻으로도 그런 아버지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늘 주눅들 수밖에 없으며, 어렵고 불편해 무릎 꿇고 앉은 발이 저릴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게는 요즘 세상이 어찌나 혼란스러운지, 친구를 따라 처음 올라타 본 전차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저 어지럽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이미 세상은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 단지 본인이 그 물결에 휩쓸릴 수 없으며 발을 담그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야구 솜씨가 유생으로 말하자면 퇴계 이황 선생 정도는 된다고 큰 소리 치는 아들이 괘씸해 아들의 이마에 바둑통을 던지긴 했지만, 고향땅 서당 아이들에게는 우리 아들 야구 솜씨가 퇴계 이황 선생만큼 된다고 자랑을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란 그런 존재일까. 나의 길을 따라 주길 바라면서도, 나를 넘어서 또 다른 길로 나서는 아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존재일까.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 호창에게 YMCA 야구단 소식이 실린 황성신문을 쓰윽 내미셨던 것일까.

유쾌하고 부담 없는 영화 속에서 우리의 아버지는 또 하나의 큰 언덕으로 자리하고 계시다. 세상이 뒤집히고 나라가 무너지는 혼란의 틈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며, 서로의 길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더없이 기분 좋게, 그렇지만 또 그만큼의 무게로 가슴에 남는다.

덧붙이는 글 | ( YMCA 야구단  / 감독 김현석 / 출연 송강호, 김혜수, 신구, 김주혁 등)

덧붙이는 글 ( YMCA 야구단  / 감독 김현석 / 출연 송강호, 김혜수, 신구, 김주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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