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추바이, 홍군의 전사이자 문인으로 기억된다
사실이다. 중국인 가운데는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일본군이나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던 때, 자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럼 중국인들은 과연 겁쟁이여서 일본을 향해 폭탄한번 못 던진 것일까. 하지만 이것을 중국인들의 혁명기질이나 두려움 등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인 시각일 수 있다. 중국인들은 한국인 못지 않게 용감하기도 하다. 물론 그들은 기질이나 전투 능력에 있어서 위구르나 말갈, 여진, 만주족에 비해 강하지 못하다.
중국사에서 자신들의 영토가 파키스탄까지 이르렀다는 당(唐) 나라 시대만 해도 한족의 정부는 스스로 오랑캐라 부르던 변방의 민족들에게 조공에 가까운 대우를 해야 했다. 중국이 변방국가에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은 몇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의 영토를 서구로 넓히는 데 공헌을 한 한무제 조차 후반에는 신선술에 빠져서 점차 세력이 약화됐고, 역시 가장 강성했다는 당 태종 역시 후반에 고구려 원정 실패로 그 세력이 극히 약해졌다. 당연히 당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는 수, 당, 송, 명 등 한족 정권과 원, 청 등으로 이어지는 한족과 변방민족의 정권 교체사를 통해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그들이 이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일까. 사실 오랫동안 지나가니 변방민족도 우리민족이랑 큰 차이가 없고, 우리랑 생각하는 것이 같더라하는 것이다. 이는 중원에 들어온 변방민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끝없이 악비(岳飛)같은 독립운동가도 있고, 반청복명운동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다리면 어떤 세력도 무너지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역사는 항상 그것을 증명했고, 근현대에도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고가 일본이라는 침략자에 대한 방어능력을 약화시켰다. 더욱이 그 시기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중국민족의 방어기제가 대외적으로 작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중국에는 우리와 같이 목숨을 던져서 무엇인가를 지킨 이들이 없을까. 자신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는 인구 대비로 봐도 우리나라에서의 투쟁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패망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이 있기도 하지만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항일전쟁의 영향이 적지 않다. 당시 중국인 가운데 항일전쟁으로 죽어간 이는 2천만명이 넘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도 수백만의 병력을 잃었다. 결국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군인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 취추바이, 혁명가지만 낭만적 삶을 살다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