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윤봉길 의사같은 이가 있을까

<차이나소프트 -역사 3> 민족보다는 이념을 지키기 위해 혁명적 삶 살다간 이 많아

등록 2002.10.21 09:04수정 2002.10.2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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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비교가 안될 만큼 만신창이다.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서구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일본에게 끊임없이 협박을 받아야만 했다. 베이징 서북 방향에 있는 위앤밍위앤(圓明園)은 그 현장 가운데 하나다.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위앤밍위앤에 들렀다. 이곳은 중국의 서구에 대한 동경과 배신의 역사로 중국이 의도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청 왕조가 들어서 조성되기 시작한 이 여름 궁전은 청나라 후반 전성기를 이끈 건륭제(乾隆帝)가 서구의 바로크식 건축양식을 모방해 지은 화려한 궁전이다. 하지만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이곳은 기둥하나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만큼 초토화가 됐고, 중국은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위앤밍위앤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수십일간 불탔고, 서양 군인들은 그 안에 든 보물을 챙겨서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름다운 궁전의 대리석과 비석 등이 그 자리에 있는 데 도저히 그 근거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게 파괴되어 있기때문에 위앤밍위앤의 역사를 말하는 중국인들의 표정은 잔득 상기되어 있다. 그런 중국사를 만나면서 우리들은 작은 의문을 갖게 된다. 바로 우리의 안중근, 윤봉길같은 독립지사가 왜 없는가 하는. 우리가 역사에서 윤봉길 의사를 배울 때 상하이 홍쿠(현재는 루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장들을 날릴 때, 도대체 수억에 달하는 중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 역사가 이민족 수난에 대한 인식 무디게 해

취추바이, 홍군의 전사이자 문인으로 기억된다
취추바이, 홍군의 전사이자 문인으로 기억된다
사실이다. 중국인 가운데는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일본군이나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던 때, 자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럼 중국인들은 과연 겁쟁이여서 일본을 향해 폭탄한번 못 던진 것일까. 하지만 이것을 중국인들의 혁명기질이나 두려움 등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인 시각일 수 있다. 중국인들은 한국인 못지 않게 용감하기도 하다. 물론 그들은 기질이나 전투 능력에 있어서 위구르나 말갈, 여진, 만주족에 비해 강하지 못하다.

중국사에서 자신들의 영토가 파키스탄까지 이르렀다는 당(唐) 나라 시대만 해도 한족의 정부는 스스로 오랑캐라 부르던 변방의 민족들에게 조공에 가까운 대우를 해야 했다. 중국이 변방국가에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은 몇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의 영토를 서구로 넓히는 데 공헌을 한 한무제 조차 후반에는 신선술에 빠져서 점차 세력이 약화됐고, 역시 가장 강성했다는 당 태종 역시 후반에 고구려 원정 실패로 그 세력이 극히 약해졌다. 당연히 당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는 수, 당, 송, 명 등 한족 정권과 원, 청 등으로 이어지는 한족과 변방민족의 정권 교체사를 통해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그들이 이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일까. 사실 오랫동안 지나가니 변방민족도 우리민족이랑 큰 차이가 없고, 우리랑 생각하는 것이 같더라하는 것이다. 이는 중원에 들어온 변방민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끝없이 악비(岳飛)같은 독립운동가도 있고, 반청복명운동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다리면 어떤 세력도 무너지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역사는 항상 그것을 증명했고, 근현대에도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고가 일본이라는 침략자에 대한 방어능력을 약화시켰다. 더욱이 그 시기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중국민족의 방어기제가 대외적으로 작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중국에는 우리와 같이 목숨을 던져서 무엇인가를 지킨 이들이 없을까. 자신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는 인구 대비로 봐도 우리나라에서의 투쟁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패망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이 있기도 하지만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항일전쟁의 영향이 적지 않다. 당시 중국인 가운데 항일전쟁으로 죽어간 이는 2천만명이 넘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도 수백만의 병력을 잃었다. 결국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군인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 취추바이, 혁명가지만 낭만적 삶을 살다간


취추바이, 그는 문혁기에 탈영자로 낙인되기도 했다
취추바이, 그는 문혁기에 탈영자로 낙인되기도 했다
이런 대외적인 상황과 달리 내부적으로 공산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도 많다. 또 반청복명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이도 많다. 물론 민족간 정권 쟁탈전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지만 이보다는 자신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희생자는 당연히 공산당의 초기 발전과정에서 많았다. 국민당은 공산당의 맹아를 뿌리뽑기 위해 공산당 초기부터 집단적인 검속을 통해 많은 이들을 처형했다.

이 가운데는 마오쩌둥의 첫 부인인 양카이후이(揚開慧)와 그의 동생 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있다. 단지 우리 역사가 아니어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혁명과 투쟁을 위해 흘린 피가 적지 않다. 근현대 교체기의 희생자에 관한 기록으로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조너선 스펜스의 ‘천안문’(이산 간)이다. 이 책에는 근현대 중국 정치의 현장에서 희생당한 많은 이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런 이들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이가 바로 취추바이(瞿秋白)와 우리에게도 알려진 작가 딩링(丁玲)이다.

2001년 정치극은 실패한다는 중국 드라마의 관행을 깨고, 시청률에서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중국 홍군의 대장정을 다룬 드라마 ‘장정’(長征)이다. 드라마의 중반에 가장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취추바이의 면면이 나타난다. 취추바이는 1934년 10월 16일 장정이 시작될 무렵 후방에 남는다. 34년 1월 소비에트에 들어온 그는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소비에트의 교육부장이 된다. 주력이 이동하면서 후방에 남은 이들에게 남긴 임무는 소비에트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한편 장정군을 추격하는 국민당군을 저지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천생이 시인에 가까운 취추바이는 군사적인 지도력은 떨어졌다. 결국 35년 상하이를 향했지만 체포되고, 6월에는 사형에 처해진다. 이후 그는 혁명열사로 취급됐지만 문화대혁명 기간에 ‘탈영자’로 인식되고, 결국 68년에는 ‘부르조아 세력의 일원’으로까지 비난받았다. 중국 역사에서 그의 모습이 두드러진 것은 그가 중국 문학사에서도 족적을 남긴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취추바이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기에 더욱 기이한 모습을 갖고 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나이인 16세때 그의 어머니는 이미 몰락한 가세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성냥개비의 붉은 부분인 적린의 상당량을 술에 타서 먹은 후 자살했다. 어머니의 자살 후 그는 베이징에 올라가 러시아어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중에 시를 배웠으며, 불교 등에도 심취했다. 이 기간에 그는 리다자오(李大釗)의 도움으로 마르크스 사상을 배워,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는 러시아에 방문했으나 러시아도 그가 생각했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톨스토이의 딸을 만나고, 레닌을 만나는 등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는 22년 러시아를 방문한 천두슈(陳獨秀)를 만난 인연과 러시아에서 싹 튼 혁명의 기운에 감동해 공산당에 가입한다. 1923년 여름 광저우에서 열린 제 3차 공산당 전국대회에서는 24세의 나이에 중앙위원에 피선됐다. 러시아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상하이 등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25년에는 베이징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쉬즈모(徐志摩), 딩링 등과 교분을 나눴다.

31년에 마오쩌둥의 부탁으로 지앙시 소비에트에 들어와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결핵으로 인해 장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상하이로 가는 도중 체포되었고, 1935년 6월 18일에 총살당했다.

- 딩링, 살아서 근현대의 고통을 글로 남긴 여걸

딩링, 중국 현대 문학계의 거장이자 다양한 인상을 심어준 여작가다
딩링, 중국 현대 문학계의 거장이자 다양한 인상을 심어준 여작가다
취추바이와 몇 차례 삶이 교차했던 딩링은 중국 현대사의 급류를 타고 가장 빠르게 움직인 부표(浮漂)와도 같은 여인이다.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곧 중국 현대사가 가진 기이한 흐름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그녀의 초반기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로서의 모습이다. 1904년 후난(湖南)성 창더(常德)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1908년에 병사하면서 곡절많은 삶에 들어간다. 1921년에는 진보적인 선생을 해고하는 학교의 조치에 항의해서 자퇴하고 친구 왕젠훙(王劍虹)과 상하이로 왔지만 이후, 난징, 상하이, 베이징을 오간다. 그녀는 1923년취추바이를 알게 되고, 루쉰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25년에는 후예핀(胡也頻)과 동거한다. 27년에는 중국 페미니즘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소피의 일기’를 출간해 일약 스타가 된다. 하지만 31년 후예핀이 상하이에서 처형된다. 이후에 좌익에 투신한다. 좌익 간행물 베이더우(北斗)를 주편하고, 32년에는 공산당에도 가입한다. 35년에는 난지에서 가택연금당하지만 36년 탈출해 홍군의 대장정 기착점인 바오안에 가서 사회주의 문학에 치중한다.

42년에는 천밍(陳明)과 결혼한다. 49년 공산화 이후에는 문학분야에서 상당한 지위에 오르지만 55년에는 반당사건에 몰린다. 58년에는 헤이롱지앙(黑龍江)성에서 육체노동을 한다. 문혁기간에도 고통을 당한다. 78년에야 누명을 벗고, 79년에는 작가협회 부주석으로 선임된다. 이후에 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86년 83세에 영면한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국민당에 처형당할 때, 살아남았다는 것 등으로 인해 수없이 고통을 당한다. 또 선도적인 자유연애주의자로 방종에 가까운 성적 탐닉을 겪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봉건적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격렬했던 분열과 격동의 시간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날아오른 불나비 같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페미니즘 경향의 소설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힘든 가운데도 창작을 지속한다. 그녀에 대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평가는 지금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나 중국의 현대가 걸어온 방향이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허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여전히 평가를 거부받는 문화대혁명이나 지도권 쟁탈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쭝청(宗誠) 교수의 책 <딩링>을 읽으면 알 수 있다.

팡즈민, 영웅이 필요한 현대사에서 부각되는 인물가운데 하나다
팡즈민, 영웅이 필요한 현대사에서 부각되는 인물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중국 근현대사의 인물 가운데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었다. 중국의 대외적인 정치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던 1909년 안중근의 의거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중국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보던 1932년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 의거를 통해 만신창이가 됐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소생할 수 있었고, 이후 저지앙-광둥-광시-충칭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열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1935년 국민당의 포위전에 맞서 싸우다가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처형당한 팡즈민(方志敏)이나 예팅(葉庭) 장군, 양후청(揚虎城) 장군 등이 중국인들은 영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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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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