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다오

<시와 아이들> 마지막 가을 수업 이야기

등록 2002.11.08 12:49수정 2002.11.1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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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유정이의 가을편지

유정이의 가을편지 ⓒ 안준철

겨울 초입이라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나오면
밖은 이미 어둑해지고
서편 하늘엔 노을이 볼그레하다

얼마나 애썼으면
저리도 뒤끝이 고울까

저 하늘을 보라고
저 붉은 노을을 좀 보라고
옷소매를 잡고 사정해도
휘적휘적 서둘러 가버리는 아이들

가슴이 볼그레한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하늘의 마지막 수업을 빼먹고.

-졸시, 마지막 수업


어제 마지막 수업을 했습니다. 실업계 학교라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현장 취업을 떠난 아이들이 절반, 그리고 남은 절반의 아이들도 어제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생활 현장으로 떠났습니다. 다섯 이파리 빨간 단풍 같은 손을 제게 흔들며 갔습니다. 이제 겨우 정이 들자 헤어지게 되어 좀더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굳이 떠나보내지 않아도 될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능시험이 끝나면 모든 학교 교육이 막을 내리는 이상한 풍조에 휩쓸려 학교에 남아 있어도 시간만 낭비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저도 아이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서편 하늘의 붉은 노을처럼 뒤끝이 고운 사람이 되라고 말해온 것들이 허망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지막 수업은 가을 수업을 겸하여 했습니다. 3학년 담임을 맡다보니 엄두도 못 내던 가을수업을 드디어 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제 노을만큼이나 붉은 낙엽을 눈처럼 흰 종이 위에 붙이고, 먼저 낙엽에게 이런 저런 사연의 편지를 띄웠습니다.

가을 마신 예쁜 낙엽들아 안녕!


a 마지막 수업으로 제자를 떠나보낸 안준철 선생.

마지막 수업으로 제자를 떠나보낸 안준철 선생. ⓒ 오마이뉴스 조호진

가끔은 나뭇가지를 떠나 내 발 밑에서 뒹구는 네 모습을 볼 때면 이리저리 어쩔 줄 몰라하며 방황하는 내 모습을 읽곤 해. 너는 이제 땅 속으로 스며들어… 봄이 되면 너의 나무에서 초록빛 새싹을 보게 되겠지.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나도 때론 너마냥 부드러운 바람결 따라 걱정 없이 뒹굴어보고 싶어… 다시 만나자. 내년 이맘때쯤… 그땐 나도 나에 대한 이 모든 답을 찾을 수 있겠지…

낙엽에게

요번 가을엔 낙엽 지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어요.. 수능 공부(?) 하느라!! 세월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어요. (…) 오늘 담탱이(?)가 가을 수업한다고 이렇게 난리예요. 어쩔 땐 엄청 엉뚱하거든요. 저번 가을 소풍 땐 냇가에서 혼자 물장구를 치더라구요. 어린애 같이... 하지만 보기 좋더라구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것 같았거든요. 오늘도 혼자 낙엽 줍고... 선생님은 오늘도 싱글벙글이에요. 선생님은 아직도 소년인가 봐요.


가을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와 아이들이 남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행복을 가르치고 행복을 전염시키는 교사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해마다 가을 수업을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또 한 갈래의 행복의 길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돈과 성적만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아니 그렇게 배운 아이들에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분께

선생님.. 1년 동안 같은 교실에서 함께 얼굴 마주하며 지내서였는지 편지 한 번 드리지 못했어요. 항상 떠들어대고 툴툴대는 저를 미소 띤 얼굴로 언제나 무한한 사랑으로 다독여주시는 선생님께 이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선생님께도 가끔은 화나거나 슬픈 일도 있겠지요? 하지만 1년을 선생님을 알고 지내면서 선생님께는 행복만이 머무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선생님의 두 눈가에 웃으면 생기는 주름이랑 입가에 항상 머무는 미소일 거예요.


언젠가 한 아이가 저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실 수 있죠?"하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따지는 듯한 투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와 엇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질문을 던진 그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인생을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인생살이가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선생님은 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 이 거니?"

그렇게 물은 뒤에 눈으로만 그렇다고 대답하는 그 아이에게 저는 칠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그 답을 이렇게 써 주었습니다.

"고난이 닥칠수록 내 가슴은 뛴다 - 프리드리히 니체"

a '아이들아 단풍처럼 고운 마음으로 살아다오'

'아이들아 단풍처럼 고운 마음으로 살아다오' ⓒ 오마이뉴스 조호진

어제, 가을 수업을 한 시간 앞두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2교시가 끝나면 교정이나 뒷산에 가서 낙엽을 주어오라고 아이들에게 일렀는데 그만 난데없는 비가 쏟아진 것입니다.

어제는 3교시가 마지막 수업이고, 그 시간이 또한 올해의 마지막 수업시간이기도 해서 올 가을 수업을 결국 못하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굵고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는 제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잠시 후, 저는 교무부장 선생님께 우산을 얻어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편 교정에 유일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로 먼저 걸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비에 젖은 노란 은행잎들을 정성껏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이파리 빨간 단풍나무가 있는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서도 아이들 손가락을 닮은 단풍잎들을 주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학교 뒷산 상수리나무 숲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뭇잎 배처럼 생긴 갈잎들을 주어 수돗가에서 깨끗이 씻은 뒤에 교실로 들어가 신문지를 깔고 덮어 물기를 말끔히 없앴습니다.

아이들은 비가 와서 가을수업을 하지 못할 것으로 알았다가 환한 얼굴이 되어 노랗고 빨갛고 흙빛이 나는 낙엽들을 가져가 종이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못 말리는 담임이라고 속으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도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추억 만들기'를 해보려는 저의 뜨거운 마음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낙엽을 줍기 위해 비가 오는 상수리나무 숲을 오르면서 저는 '고난이 닥칠수록 가슴이 뛴다'는 니체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비가 오는 날 낙엽을 줍기 위해 산을 오르는 낭만적인 행위와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붕괴된 교실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재건하는 일은 교사로서 도전해볼 만한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가을 & 선생님

봄에는 봄 수업을 하자! 가을이 되면 가을 수업하자! 그런데 올해는 3학년인 저희를 맡아 제대로 하고 싶은 그런 수업을 하지 못한 듯 생각이 되네요... 봄에 선생님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11월.. 가을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빨리 온 추위에 겨울 월동 준비를 해야하네요.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올 해 가을이 못내 쓸쓸해요. 내년 가을엔 직접 예쁜 낙엽들을 주으러 가고 싶어요... (..같이 주으러 갈까요?..) 가을비인지 겨울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비가 창 밖에서 하염없이 내리고 있어요.

나에게 쓰는 편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속 깊숙이 숨어 있는 너를 불러본다. 19살 넌.. 어느새 이 만큼이란 시간이 흘러버렸어. 미안해. 8살 적 난영아. 초등학교 운동장 구령대 아래에 줄서 입학식 하던 날 나는 약속했었는데.. 엄마 아빠에게 자랑스런 딸이 되겠다고. 19살의 난영이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 약속조차도 잊어버리고 살아왔어.

a 가을 그리고, 갈대가 흔들리고 있다.

가을 그리고, 갈대가 흔들리고 있다. ⓒ 이돈기

오늘 아침 버스에서 내려 학교 가는 길에 다리 아래서 헤엄쳐 다니는 오리 떼를 보았어. 그제도 보았고... 그 전날 전날에도 보았어.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뒤도 한 번 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내 걸음을 재촉했을까? 어느 만큼 걸어서 멈춰보니 아무 것도 없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까닭이겠지.

이제 나도 오리 떼들 마냥 천천히 나에게 상처 난 부분을 치료하고 다시 뒤돌아 갈 생각이야. 그리고 진짜 나에 길을 찾아 달릴 거야. 너와 했던 8살 난영이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래의 난영이에게 약속해. 이번엔 꼭 지킬께. 믿어주겠지? 19살의 난영이가.


가을 수업은 자기 성찰의 시간이요, 자기 치료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한 번도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그래서 멈춰보니 아무 것도 없는, 처음부터 잘못 든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그리하여 자신에게 스스로 치유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구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런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은 가슴이 볼그레한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하늘의 마지막 수업의 교훈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붉게 물든 서편 하늘의 고운 노을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먼 훗날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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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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