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따뜻한 사람이 더 행복하다

하루 출장, 혹은 도보여행 이야기

등록 2002.12.19 10:41수정 2002.12.3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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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실습 나간 아이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수원과 천안 등지로 실습을 나간 학생들은 며칠 날을 잡아 교장선생님과 취업부장이 함께 다녀오시고, 우리 3학년 담임 교사들은 시내 가까운 곳에서 실습중인 학생들을 둘러보기 위해 하루 출장을 낸 것입니다.

2학기가 되면서 10여명의 아이들이 먼저 현장으로 떠났고, 대입을 준비하기 위해 남아 있던 아이들도 수능시험이 끝나자 실습지로 떠나버려 쓸쓸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던 차에 공식적으로 출장을 내주어 여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어디부터 갈까? 누구를 먼저 만날까? 이런 저런 생각에 눈을 말똥하게 뜨고 잠을 설치고 있다가 문득 도보여행을 겸하여 아이들을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차도 없고 택시 값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그 돈을 절약하여 제자들과 식사라도 한 끼 따뜻하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최근 들어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던 버릇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웬만한 거리라는 것이 사실은 옛적 시골길로 말하면 한 시오리쯤 산과 내를 따라 걷다가 높은 재도 넘어야 하는 꽤 먼 거리입니다. 가는 길만해도 2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지요. 순천에도 신도시가 생겨 그곳에서 모임을 갖는 날이 잦아지다 보니 어쩌다 한 번씩 밤늦은 시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는데, 그것이 차츰 취미로 굳어진 것이지요.

그래도 공무를 보러 가는 사람이 개인적인 취향을 좇다가 일을 소홀히 하면 안되지 싶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서둘러 길을 재촉했습니다. 어깨에 둘러맨 작은 가방에는 시집 한 권과 수건 한 장, 그리고 필기도구와 사진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가벼운 차림에 가벼운 마음으로 사뿐한 걸음을 옮겨 주택지를 벗어나 막 동천으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왼편으로 보이는 산등성에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에 잠시 눈이 부신 표정으로 서 있다가 황급히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어 첫 셔터를 눌렀습니다.

a 아침 일찍 길을 떠나며

아침 일찍 길을 떠나며 ⓒ 안준철

제가 길을 걷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한때나마 걸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년 전쯤 허리디스크를 앓았던 바로 그해 저는 걸어서 10분 거리의 직장을 30분도 넘게 걸어서 가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병이 어느 정도 낫고 난 뒤의 일입니다. 병세가 심할 때는 누워서 알약 하나 넘기가 어려웠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무엇보다도 화장실에서 뒤를 보고 밑을 닦을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통해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애썼구나, 허리여
낯 씻고 머리 감고
냄새 나는 발가락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 네 일이었구나


뒤보고 밑은 닦을 때도
네 힘이 필요했구나

이부자리 개서 장롱에 넣고
양말 갈아 신고
읽다가 버려둔 책
다시 주어 책꽂이에 꽂은 것도 너였구나


네 무등을 타고
이마가 시를 쓰고
가슴이 노래를 불렀구나

네 아름다운 몸들이
기뻐 뛰고 춤추며
환희의 사랑을 나눌 때
너는 견디고 있었구나

너로 인해
앉지도 서지도 못할 때
누워서도 알약 하나 넘길 힘이 없을 때
나는 매운 회초리 맞아가며 배웠구나

이어주고 받쳐주고 거드는 일
작은 일 아니라는 것을.

-졸시, '허리앓이'


a 죽도봉으로 가는 탱자나무 길

죽도봉으로 가는 탱자나무 길 ⓒ 안준철

고난은 마치 환한 끝이 보이는 어두운 터널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직 허리가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학교까지 씩씩하게 걸어가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조금 못해도, 가끔씩 일탈행동을 해도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나름대로 자기 행복의 길을 찾아가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아는 어진 마음만 있다면, 작은 재능을 갈고 닦아 빛낼 수 있는 최소한의 끈기가 있다면, 그리고 이미 주어진 것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참된 지혜만 있다면.

a 전망대로 가는 동백나무 길

전망대로 가는 동백나무 길 ⓒ 안준철

어느 핸가 남학생반 담임을 하던 해의 일입니다.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제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무렵 학교로 외부 강사 한 분이 초청되어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머지 않아 세계를 지배하는 중심국가가 될 것임으로 이에 대비하여 큰 꿈을 품으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얘기로 들렸는지 멀뚱하게 앉아만 있던 아이들의 표정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서 그려본 일화입니다.

한 동네에 세 명의 가게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연하게도 같은 학교를 나온 고교 동기생이었습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하고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도 처지가 비슷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꼬마아이가 갑이 운영하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껌 한 통을 달라고 했습니다. 갑은 날씨도 추운데 껌 한 통을 사러온 그 아이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눈짓으로만 껌 있는 곳을 가리키며 돈도 거기에 놓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가 이번에는 을이 경영하는 가게로 갔습니다. 을은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님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을 만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가게에 들어와 껌을 달라고 하자 조금은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꼬마 단골을 한 명 놓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직접 껌을 집어서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며칠 뒤 꼬마아이는 병이 경영하는 가게에 들렸습니다. 병은 성실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가게에 들어오는 꼬마아이의 얼굴이 빨간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따뜻한 손으로 녹여주기도 하고, 빨갛게 언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벼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손에 껌 한 통을 쥐어 주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이를 보냈습니다. 꼬마아이가 건네준 동전을 통에 넣으면서 또 한 번 그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 뒤에 제가 물었습니다. 이들 세 사람 중 누가 가장 돈을 많이 벌었을까요?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누가 가장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일까요? 그리고 누가 가장 성공한 사람일까요? 네 가지 질문 모두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병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하고, 남을 기쁘게 해주고, 성공까지 거머쥔 이 대단한 사람의 삶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a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천과 시내 정경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천과 시내 정경 ⓒ 안준철

그 답을 말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삶의 조건은 같아도 삶의 태도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꼭 일등을 하지 않아도, 꼭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유명해지지 않아도, 세계를 지배할 만한 엄청난 능력이 없어도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소질만 있다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a 팔마비와 연자루 - 하얀 점선처럼 보이는 것은 비둘기임

팔마비와 연자루 - 하얀 점선처럼 보이는 것은 비둘기임 ⓒ 안준철

순천에는 팔마비(八馬碑)에 얽힌 아름다운 일화가 있습니다. 고려 충렬왕((1277년)때 순천부사로 재임하던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어 내직(內職)으로 들어갈 때에 당시의 관례대로 순천부민들은 말 8필을 선물로 줍니다. 최석 부사는 이러한 관례를 폐습으로 생각하고 서울(개성)에 도착하여 도중에 낳은 새끼말 1필까지를 합해 9필을 다시 순천 부민들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부터는 부사들에게 이러한 폐습이 없어지게 되었고, 고을 사람들은 최석 부사의 청렴한 뜻을 기리고자 팔마비를 세우게 됩니다.

이 일화를 가만 곱씹어보자면, 최석 부사가 대대로 칭송을 받는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은 어쩌면 희소성 원칙이 적용된 것 같기도 합니다. 백성들을 생각하는 선한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런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알고 보면 별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경력을 쌓거나 애써 공을 들이는 것보다는 착한 마음만 품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a <오마이마트> 카운터에서 포즈를 취한 은애 - <오마이뉴스> 전남동부지역 사무실이 이곳에 있음.

<오마이마트> 카운터에서 포즈를 취한 은애 - <오마이뉴스> 전남동부지역 사무실이 이곳에 있음. ⓒ 안준철

드디어 산을 내려와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은애는 마트에서, 순희는 약국에서, 그리고 지향이는 옷가게에서 각자의 삶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너머 먼 길을 걸어서 찾아온 제자들이어서 그랬는지 반가운 마음이 더 컸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너를 찾아왔다."

a 자매처럼 다정해보이는 남문약국 약사님과 순희

자매처럼 다정해보이는 남문약국 약사님과 순희 ⓒ 안준철

저는 학교보다는 거리나 다른 장소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가 참 좋습니다. 40명의 아이들을 한 눈으로 상대할 때는 관리자로서의 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나기라도 하면 친구처럼 가볍게 농도 걸고 장난을 칠 수가 있어서 좋지만, 그보다는 마음놓고 그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한 생명이 우주처럼 커 보입니다. 사랑의 눈은 숨길 수 없는 법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아이도 제가 먼저 사랑하면 그도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a 우리반 도서부장인 지향이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반 도서부장인 지향이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한다 ⓒ 안준철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 가슴 설레고 엄청난 일은 해마다 공식적으로, 월급까지 받으면서 할 수 있는 교사라는 직업이 저는 좋습니다. 물론 고통이 따르고 때로는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중한 것을 얻었는데 그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어떤 사랑을 줄 것인가? 그것을 늘 고민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고민하다보면 길이 보입니다. 때로는 길을 몰라 헤맬 때 아이들이 그 길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성장은 아이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a 천안에서 실습중인 단짝 은지와 수경이 - 쉬는 날 내려와 곱창 골목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시내 거리에서 포즈를 잡았다

천안에서 실습중인 단짝 은지와 수경이 - 쉬는 날 내려와 곱창 골목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시내 거리에서 포즈를 잡았다 ⓒ 안준철

제가 교사로서 선택한 사랑은 평등의 사랑입니다. 생명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랑입니다. 교육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랑입니다. 공부하여 남에게 주는 사랑입니다. 있는 자들의 자녀들만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싸움을 거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성적만으로 서열화하는 것을 미워하는 사랑입니다. 끝내 인간의 착함을 키워주는 사랑입니다.

늘 아쉽고 부족한 사랑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하루하루 키가 커 가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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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이 기자의 최신기사 슬프자고 작정한 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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