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나무보다 위대합니다

자연에게서 배우는 지혜

등록 2002.12.16 12:05수정 2002.12.1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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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인데도 햇살이 좋아 산책 삼아 산자락에 있는 밭에 다녀왔습니다. 밭에 갖다 버릴 음식 쓰레기를 손에 들고 나왔지만 산길로 접어들다 보면 손에 무엇을 들었는지조차 까마득히 잊고 맙니다.

가을 한때,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지천으로 피어 있던 여뀌들도 죄다 색이 바래어 길가에는 색감을 사용할 만한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한가함에 마음이 동합니다.

a 밭으로 가는 길

밭으로 가는 길 ⓒ 안준철

가을걷이를 끝낸 과수들도 겨울을 맞아 긴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저렇게 마냥 손을 놓고 한 철을 내내 쉴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위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나무들이 인간의 조급함을 닮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무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조무래기 과실들을 매달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들은 휴식의 시간이 곧 생산의 시간임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휴식이라든가 사색이라든가 하는, 그런 좀 한가하게 느껴지는 단어들에게 정이 느껴집니다. 산책이란 말도 그렇지요. 이제는 너무 고풍스런 단어가 되어 버린 감이 있지만 말입니다. 공휴일에도 차를 타고 멀리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아무래도 잠시 빌려 사는 이 지구에 나쁜 공기를 한 줌이라도 더 보태게 될 테고, 눈여겨보면 가까이 있는 것들이 더 정겹고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a 겨울나무의 휴식

겨울나무의 휴식 ⓒ 안준철

음식쓰레기를 밭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산기슭에서 대여섯 마리의 닭들이 한가하게 노닐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닭장이나 망으로 쳐진 울안에만 갇혀 있던 닭들이어서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언젠가는 닭 두 마리가 망을 뚫고 나와 비칠대며 걸어다니기에 잡아 넣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경계를 하고 뒷걸음을 치던 닭들이 어느새 순화가 된 모양입니다. 주인이 안심을 하고 문을 열어놓은 것을 보면.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는 어쩔 수 없는 선생인지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생각에 다시금 빠져들고 맙니다. 방학이 돌아와도 즐겁지 않은 아이들. 나무도 사람도 자연의 아들인데, 그러한 자연법칙에 눈 먼 어른들로 인해 휴식과 사색의 시간들을 빼앗긴 아이들. 땅에 파종된 씨앗들처럼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수 없어 조무래기가 되고 말 아이들. 그렇게 길이 들어 이제는 그것이 제 길인 줄만 아는 아이들.

a 울안에서 모이를 먹고 있는 닭들

울안에서 모이를 먹고 있는 닭들 ⓒ 안준철

겨울나무들은 앙상하지만 의연합니다. 농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조급하지도 않습니다. 무릇 생명은 휴식과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식의 시간이 곧 생산의 시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도 휴식과 사색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나무는 아니라구요? 맞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보다 위대합니다. 그런 믿음 없이는 큰 교육은 불가능합니다.


휴일을 지내고 다음날 출근길에 가는 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을 펴들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평소에도 저는 걸어서 10분 거리를 20분도 더 넘게 걸려서 학교에 닿곤 합니다. 조금만 일찍 서둘면 출근길은 산책길이 됩니다. 길을 가다 말고 어떤 광경에 잠시 넋을 빼앗기고 서 있다가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냅니다. 빛이 없는데 사진이 잘 나올까? 염려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찰칵!

a 출근길에 만난 작은 눈부심

출근길에 만난 작은 눈부심 ⓒ 안준철

덧붙이는 글 | 처음으로 사진을 직접 찍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처음으로 사진을 직접 찍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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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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