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시로 파란 쑥이 올라오더라카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48> 얼음따기

등록 2003.02.06 09:49수정 2003.02.0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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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꼼~ 보꼼~ 보꼼~ 보꼼~ 보꼼~."
"언가(형님)야, 내는 인자 더 못 뚫것다. 입안이 얼음처럼 얼어붙어가 얼얼하다 고마."
"보꼼~ 보꼼~ 보꼼~."
"그라모 치야뿌라(치워버려라) 고마."


"보꼼~ 보꼼~."
"그라모 내 얼음은 우짜고?"
"보꼼~ 보꼼~ 보꼼~."
"할 수 없다 아이가. 손이 시리더라도 손에 들고 뿌사무라(부셔먹어라) 고마."

겨우내 우리 마을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국회의원 이마처럼 훤하게 열린 마을 앞 논둑에 나가 수정처럼 맑은 얼음을 땄다. 특히 우리가 좋아하는 질 좋은 얼음은 주로 논 경계선 사이에 패여진 물꼬에 많이 얼어붙어 있었다. 또한 다랑이논을 이어주는 꼬마 폭포 같은 물꼬에는 무소 뿔처럼 생긴 제법 굵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고드름은 너무나 딱딱하고 두꺼워서 우리들 이빨로 깨어먹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간혹 그 고드름을 억지로 깨어 먹으려고 용을 쓰다가 이빨이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빠지는 이빨은 대부분 헌니였다. 그래도 고드름을 깨물다가 이빨이 빠진 아이들은 피침을 벌겋게 내뱉으며 고드름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 같은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보꼼~ 보꼼"이란 소리는 우리들이 딴 얼음에 침으로 구멍을 낼 때 나는 소리였다. 당시 우리는 겨울방학 책만한 얼음을 따서 적당한 위치에 구멍을 낸 뒤 볏짚으로 매달고 다니며 얼음을 조금씩 깨서 먹었다.

그 얼음에 구멍을 낼 때 사용하는 도구가 대나무 가지였다. 대나무 빨대는 대나무의 잔가지를 꺾어 양쪽 마디를 잘라내면 된다. 얼음을 잘못 다루면 쉬이 깨지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대나무 빨대를 입에 물고 따스한 침을 수없이 왕복시켜 얼음에 작은 구멍을 냈던 것이다.


그렇게 얼음조각에 우리들 콧구멍 같은 동그란 구멍이 나면 그 구멍에 볏짚을 끼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얼음에 구멍을 내고 볏짚을 끼워 들고 다니는 것도 손이 시렵지 않게 하기 위한 우리 마을 아이들의 작은 지혜였다. 또 그 얼음을 얼굴까지 높이 치켜들고 얼음 사이로 서로 마주보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어~ 추워!"
"니 얼음을 너무 많이 묵고 감기 걸린 거는 아이제?"
"하모. 나는 감기 겉은 거는 아예 안 걸린다. 에에취~."
"니 아무래도 안되것다. 니 손에 들고 있는 그 얼음은 내한테 주고 뜨뜻한 아랫목에 가서 검정 이불 덮어쓰고 땀 좀 푹 내고 온나."


우리들은 추위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눈물 같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 얼음을 들고 양지 바른 담벼락에 앉아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내며 제법 맛있게 씹어 먹었다. 당시 먹을 게 그다지 흔치 않았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거울 같이 투명한 그 얼음은 땡겨울을 나는 훌륭한 간식이었다. 하지만 늘 아랫배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밤이 오면 우리들은 우풍 심한 작은 방에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쓴 채 생고구마를 깎아 먹거나 땅 속에 묻어둔 이마가 파아란 무를 꺼내 깎아먹었다. 고구마는 방 한귀퉁이에 쌓아둔 가마니에서 꺼내 부엌칼로 깎아 먹으면 금세 달콤한 물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하지만 무는 달랐다. 무는 잘못 고르면 바람이 든 것이 있었다. 또 바람 든 무는 마치 스폰지를 씹는 것처럼 퍼석퍼석하면서 맛이 하나도 없었다.

"올 밤은 와 이래 춥노. 마치 바람이 바람 든 무처럼 문풍지 새로 솔솔 들어오는기 억수로 춥다."
"언가야! 낼(내일) 아침에는 물꼬에 얼음이 많이 얼겠제?"
"와? 니는 고매(고구마)나 무시(무) 보다도 얼음이 더 맛있나?"
"하모. 얼음을 잘게 깨가 사카리만 넣으모 금방 아이스케기가 안되나."
"인자 파이다(아니다). 벌시로(벌써) 논둑에서 파란 쑥이 제법 올라오더라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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