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개는 더 큰 달이 떠야 될낀데"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1>달집 태우기

등록 2003.02.14 11:04수정 2003.02.1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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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월대보름 음식은 식이요법처럼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주는 훌륭한 건강식이다

정월대보름 음식은 식이요법처럼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주는 훌륭한 건강식이다 ⓒ 강원도

"야들아~ 퍼뜩 일어나거라. 부럼 까야지"
"뭐라꼬예? 부랄을 깐다꼬예"
"허허허~ 그 녀석도 참! 니 부랄을 까는 기 아이라 부럼을 깐다 이 말이다"
"부럼예? 부럼이 뭔데예?"
"일어나 보모 알끼 아이가"
"야들이요, 퍼뜩 안 씻고 뭐하노? 데피난(데워놓은) 물 다 식거마는"


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 마당에 나가 고양이 세수를 대충 한 우리들은 뜨뜻한 안방 아랫목에 앉아 저마다 땅콩과 밤, 호두 등을 집어들고 이빨로 깨물었다. 당시 우리들은 이빨로 깨문 부럼을 까서 먹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땅콩과 밤, 호두에 제 이빨자국 내기에 바빴다.

"욕심 부리지 말고 나이 수만큼만 깨물어라"
"그라모 아부지는 몇 개로 깨물어야 됩니꺼? 이거 다 깨물어도 모자라것네예?"
"어른들은 몇 개만 깨물어도 된다. 그라고 부럼을 깨물면서 올개(올해)는 부스럼 좀 나지 않게 해주이소 카고 속으로 빌거라"
"와예?"
"그래야 부스럼도 안나고 이도 튼튼해질 거 아이가"

당시 우리는 부럼이란 말을 잘 몰랐다. 그저 땅콩과 밤, 호두, 잣, 은행 등 껍질이 단단한 그런 과일을 통틀어 부럼이라고 부르는 줄로만 알았다. 또 그렇게 해야 일년 내내 얼굴에 부스럼이나 버짐이 피지 않고 이가 튼튼해진다고 믿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부럼은 '부스럼'의 준말이기도 했다.

우리들이 자랄 때에는 부스럼과 버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얼굴과 머리에는 주로 얼룩무늬 같은 동그란 버짐이 많이 피었고, 부스럼은 팔과 다리에 많이 났다. 당시 소버짐이라고 불렀던 버짐이나 부스럼이 난 곳은 몹시 가려웠다. 또 얼굴의 버짐은 마치 분필가루처럼 허옇게 피어났다.

우리 마을에서는 부스럼과 버짐을 간단하게 치료했다. 우선 신문지를 둘둘 말아 불을 피운 뒤 연기가 나는 방향에 깨끗한 그릇을 갖다댄다. 그러면 이내 그릇 속에 노오란 기름덩어리가 얇게 깔린다. 그러면 이 기름덩어리를 손으로 조금씩 찍어내 부스럼과 버짐이 난 곳에 바르면 그만이었다.

그랬다. 실제 땅콩이나 호두 같은 열매에는 부스럼과 버짐을 막아주는 영양소가 쌀보다 수십 배나 많이 들어있다고 했다. 아하~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날 아이들에게 땅콩과 호두, 밤, 잣, 은행 등을 미리 먹였구나. 일 년 동안 그 흔했던 부스럼과 버짐에 걸리지 말라고.


a 불 질러라~ 불질러라 질러~

불 질러라~ 불질러라 질러~ ⓒ 해운대구

"아나?"
"괘않심니더"
"어른이 줄 때 퍼뜩 받아 묵거라"
"아입니더. 아가(아이가) 아침부터 술로 무가(마셔서) 우짤라꼬예"
"귀밝이 술이라카이. 이 걸 마셔야 니도 일 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들을 꺼 아이가"
"그라모 쪼매만 주이소"

정월 대보름날 아침상은 내 숟가락과 젓가락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반찬 그릇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지난 설날 차례상 이후 설 음식에 어느 정도 질려 있었던 우리가 꼭 보름 만에 만나보는 푸짐한 상이었다. 그렇찮아도 곱사등처럼 휘어진 상다리가 더욱 휘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침을 먹기 전에 어머니께서 따라주시는 귀밝이술을 받아 마셨다. 당시 우리들이 마신 귀밝이술은 주로 차디찬 막걸리였다. 빈 속에 마시는 쌀뜨물 같이 허연 막거리는 목을 타고 내려가자마자 이내 가슴이 찌르르 하면서 얼굴에 열이 확 달아 올랐다. 갑자기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아(아이)는 아네. 병아리 눈물만한 그걸 받아마시고 금새 얼굴이 뺄개지는 거 보모. 우쨌거나 뽁다그리한 기(붉으스럼한 것이) 보기는 참 좋네"
"놀리지 마이소. 어지러버(어지러워) 죽것 거마는"
"정월 대보름날 찬 술로 마시모 귀가 밝아진다 아이가. 그라고 올개(올해)는 귓병도 안 생기는기라"

찹쌀, 누우런 조, 노오란 밤, 바알간 팥, 율무 등이 들어있는 오곡밥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불렀다. 또 생태를 넣어 만든 두부찌개, 민어, 전어를 비롯한 김, 콩나물, 시금치나물, 무나물, 시레기나물, 호박고지나물, 가지고지나물, 도라지나물, 고사리나물, 취나물 등에서는 고소한 참기름 내음이 코를 찔렀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이면 어머니께서는 마치 우리들의 생일날인양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오곡밥을 보름달처럼 둥그스럼하게 담아 주셨다. 그리고 오곡밥을 취나물과 함께 김에 싸서 복쌈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들 입에 넣어주셨다. 그렇게 복쌈을 먹으면 돈을 쌈 싸듯이 모을 수 있다고 하셨다.

아침부터 귀밝이술에 취한 우리들은 쥐불놀이를 하기 위한 준비로 몹시 바빴다. 깡통과 철사를 준비하랴, 송진이 많은 솔가지를 준비하랴, 볏짚을 준비하랴, 정신이 없었다. 마을 형님들은 달집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와 소나무, 참나무 등을 베어오고, 마을 앞 논바닥에 볏단을 깔고 앉아 볏짚으로 달집을 감쌀 이엉을 엮었다.

"올개(올해)는 작년보다 더 큰 달이 떠야 될낀데"
"말도 안되는 소리 좀 하지 말거라. 아, 해마다 뜨는 보름달이 같은 보름달인데 우째 올개 보름달이 더 클 수가 있다 말이고"
"그라이 니 심뽀가 틀리 묵었다 아이가. 다 마음이 중요한 기라. 니는 잘 모른다. 같은 보름달이라도 우째 다르게 보이는지"

점심나절이 지나면 우리 마을 곳곳이 마치 잔치집처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예쁜 고깔모자 쓴 마을 어르신들이 '농자천하지대본야' (農者天下之大本也)라고 씌여진 깃발을 들고 징과 괭과리를 치면서 지신밟기를 시작했다. 그때 쯤이면 마을 어머니들은 약간의 돈과 쌀, 술상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a 달집에 불이 붙으면 강강수월래를 하거나 아니면 합장을 한 채 불타는 달집을 돌며 소원을 빌었다

달집에 불이 붙으면 강강수월래를 하거나 아니면 합장을 한 채 불타는 달집을 돌며 소원을 빌었다 ⓒ 해운대구

"에헤라~ 성주야"
"이 성주가 뉘 성주고~"

마을 곳곳에서는 오랜만에 환한 웃음소리와 갖가지 농담을 주고 받는 소리로 왁자지껄했다. 마을 앞 들판에는 부지런한 마을 형님들의 손놀림으로 달집이 만들어졌고, 달집 꼭대기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오리 연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맘 때쯤이면 마을 어르신들은 지신밟기를 끝내고 달집 주변에 모여 달집을 빙빙 돌면서 신나게 풍물을 쳤다.

이윽고 저녁 어스럼이 깔려오면 마을 어머니들은 가까운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때 쯤이면 마을 할아버지들은 마을 앞에 있는 논둑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놓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궁이에서 불씨를 끄집어 내 솔갱이와 볏짚이 가득 든 깡통에 넣고 들판에 나와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달 뜬다아~"
"오데 오데?"
"니는 저기 산마루에 촛불처럼 노란 불빛이 하나 깜빡거리는 기 안 보이나?"
"맞네, 달이네, 보름달이네. 달 뜬다아~"
"보름달이 떠오른다아~"

그와 동시에 마을 어르신들의 신나는 농악놀이와 함께 달집에 불이 오르고, 산꼭대기에 서 있는 마을 어머니들은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두손을 싹싹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달집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합장을 한 채 달집을 빙빙 돌면서 저마다 무언가를 열심히 빌었다.

"달님! 올개는 제발 논농사, 밭농사, 자식농사 모두 풍년농사가 되게 해 주이소"
"달님! 올개는 노처녀가 다 된 우리 딸아(아이) 시집 좀 가게 해주이소"
"달님! 올개는 노총각이 다 된 우리 아들 장가 좀 가게 해주이소"
"달님! 올개는 우쨋거나 마을 사람들 모두 건강하게만 해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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