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으로는 닿지않는 영혼의 빈터

전남 고흥군 '나로도' 연분홍 바다에 다녀오다

등록 2003.02.16 08:34수정 2003.02.1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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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남 고흥군 '나로도' 해수욕장의 새벽바다

전남 고흥군 '나로도' 해수욕장의 새벽바다 ⓒ 안준철


나 돌아가고 싶네
저 어스름으로
저 연분홍으로

사랑보다도
사랑보다도
사랑이 오기 전
그 설렘으로

나 지금 외롭지 않아
외로웠던 그날로

파도소리가 나를 깨우네
내 안의 노예들을 깨우네

행복의 노예
웃음의 노예

나 돌아가고 싶네
행복만으로는 닿지 않는
영혼의 빈터로

나 지금 사랑하는 이 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네


사랑보다도
사랑보다도
사랑이 오기 전
그 기다림으로

나 외롭고 싶네.

-졸시, '새벽바다에서'



전남 고흥군 나로도에 다녀왔습니다. 새벽바다를 만나고 왔습니다. 가슴까지 밀물져오는 파도소리를 밤새 듣고 싶었지만, 바다의 한숨인 파도소리에 몸을 돌아눕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난밤 우린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삼치와 농어로 배를 실컷 채우고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때, 그 행복의 정점에서 그만 망연자실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밤 우린 행복했고, 그 행복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아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 순간 막막했습니다. 가슴 어디께 행복이 씻어 내릴 수 없는 한 부위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새벽바다에 나와 저 깊은 가슴속 어느 빈터까지 파도소리가 가 닿고서야 그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행복만으로는 닿지 않은 그 곳, 처연한 파도소리가 씻어준 그곳은 다름 아닌 영혼의 빈터였습니다.

a 일출 직전의 연분홍 바다

일출 직전의 연분홍 바다 ⓒ 안준철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을 종교적인 영역으로, 혹은 문학적 상상력의 맥락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영혼을 말하면 그런 좀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은 아름답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그래서 소홀히 해도 큰 손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추상적인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적 개념입니다. 영혼이 망가지면 현실의 삶도 망가지고 맙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조건으로 단 한 가지 영혼을 달라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가 준 모든 것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혼 하나로 그의 실존을 깡그리 파괴할 수 있다는. 파우스트는 소설 속에 인물이지만 인간 실존의 한 전형이기도 합니다.

영혼은 별의 빛남과도 같아서 사위가 어두워져야 제 빛을 발합니다. 인간도 대낮처럼 인생이 환할 때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외롭고 쓸쓸해야 비로소 자기 안의 실존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인식하는 순간에 구원이 옵니다. 그때의 느낌은 삼치와 농어로 배를 채우면서 느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니 새벽바다에서 '나, 외롭고 싶다'는 절규가 나오는 것입니다.

a 새벽바다의 어스름 속에서 빛나는 새벽별

새벽바다의 어스름 속에서 빛나는 새벽별 ⓒ 안준철

언젠가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슬픔이 좋은 단어냐? 나쁜 단어냐? 우문현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었지요. 몇 아이는 그것도 문제라는 식으로 나쁜 단어라고 빨리 대답을 해버렸고, 또 몇 아이는 출제경향을 살피는 듯 뜸을 들이다가 좋은 단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왜 좋은 단어냐고 묻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주었지만 끝내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두 아이는 뭔가 속으로만 말을 만들고 있는 눈치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은 부모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분 부모님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다행히도 부모님은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저축해놓고 가셨습니다. 형은 그런 돈이 뭐냐고 불쌍하게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두 분 부모님 생각에 마냥 슬퍼하기만 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돈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부모가 남긴 그 돈으로 먼저 최신 모델의 휴대폰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부모님의 반대로 살 수 없었는데 이제 살 수 있게 된 것이 내심 기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 없는 나는, 좋은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아이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우렁찼습니다.
"나쁜 놈입니다."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슬픔은 좋은 단어입니까? 나쁜 단어입니까?"
"좋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수정을 해주었습니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좋지요. 하지만 슬퍼 해야할 때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소박' 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엇이든 깊이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면 자유를 잃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보다도/사랑보다도//사랑이 오기 전 그 설렘으로' 그 처음자리로 자꾸만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제 행복의 비결은 행복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끔은 슬프고 가끔은 외로울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누군가 퍼가야 샘이 다시 솟구치듯 때로는 나를 고갈시키는 것. 그래서 가끔은 외롭고 싶은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돈을 너무 좋아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다보면 가장 심각하게 고민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은 돈에 집착하고, 급기야는 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극한에 원조교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돈에 집착하는 동안 어른들은 성적에 집착합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적과 돈은 동일물인 셈입니다. 결국 아이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은 성적만능의 입시위주 교육이 가져온 폐해라고 봐야합니다.

a 가슴 가득 밀물져 오는 바다

가슴 가득 밀물져 오는 바다 ⓒ 안준철

나로도 새벽바다를 거닐면서 바다가 무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이 트기까지 바다는 수백 번도 넘게 몸을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설렘과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 어스름으로, 그 연분홍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일출의 한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바다의 아름다움이 더 장관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대학을 준비한다는 말은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생 70에서 가장 황금기인 20세까지의 삶을 오로지 대학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의 의미만을 부여한다면 그가 일류대학에 합격을 했다고 해도 결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치 아무런 변화도 없다가 불쑥 해가 솟아버린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과정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곧 3월입니다. 긴 방학을 마치고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에 갑니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저는 무엇보다도 제 영혼의 상태를 점검해볼 생각입니다. 해가 뜨기 전의 연분홍으로 가슴이 물들어 있는지, 이미 때묻고 화석화된 사랑이라는 단어보다도 사랑이 오기 전의 설렘으로 아이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아니라면 다시 길을 떠나겠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a 나로도의 일출

나로도의 일출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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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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