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에게 어떤 선생이었을까?

대학에 입학한 제자에게 온 편지

등록 2003.02.22 04:19수정 2003.02.2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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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저는 졸업생 K입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선생님께 메일을 띄우다 보니 복잡한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대학교 OT 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선배님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었습니다.
비로소 제가 졸업을 했고 이제 대학생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내가 과연 고등학교 3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저는 정말로 한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후회가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생활동안 정말 많은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연극도 해보고 싶었고 문예부 활동도 해보고 싶었고
선후배간에 많은 정도 쌓아보고 싶었습니다.
멋진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싶었고 작은 모임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도 실천해 본 것이 없고
기회가 있었는데도 스스로 버린 것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제게 정말 큰 후회를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제는 고등학교 친구의 생일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만나고 싶었습니다.
졸업한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며 아주 오랫동안 서로 못 만난 것도 아니었지만
저희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취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시간을 버리고 살았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학교를 부끄러워하고
살았는지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가까운 존재들이었구나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우리가 정말 나이를 먹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는 모르고 지내던 후회를 우리 모두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아직 학교에 있을 후배들에게 너무 늦기 전에 우리 학교가 정말 좋은 곳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선후배간에 좀더 정을 쌓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만들어주시고
클럽활동을 그저 형식으로 끝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크고 작은 모임을 학교에 만들어서 선후배들간에 많은 교류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는 선배들과 아무런 교류없이 고등학교 3년을 보냈습니다.
그 바람에 이렇게 사회에 나와서 의지할만한 선배들이 전혀 없습니다.
후배들은 저희 같은 후회를 하지 않게 미리 학교 안에서 선후배간에
많은 정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후배들은 저희 같은 후회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치졸한 글로 선생님께 제 마음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도 보고싶고 선생님들도 보고싶습니다.
지금 생활이 힘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이 문득 그립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
2003년 2월 22일 졸업생
K올림


사랑하는 K군에게

밤 두 시에 잠에서 깨어 너에게서 온 메일을 읽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아무 한 일이 없는 것이 후회가 된다는 너의 편지를 읽고 나 또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물론 너의 담임은 아니었지만, 출석을 부를 때 너와 눈을 마주친 기억밖에는 단 한 번의 추억도, 기억할 만한 사건도 없었다는 것이.

그렇지만 너의 편지를 받고 마음 깊은 곳에 반가움도 일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다.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사유할 수 있는 한 주체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내심 반가웠다.

고1때 너를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난 너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무엇을 말하고 어떤 눈빛으로 널 대했을까? 새삼 두렵고 궁금해진다. 난 너에게 어떤 선생이었을까? 그렇다. 나도 너처럼 이 시간 많은 반성을 하고 싶다. 학교에서의 숱한 시간들 속에서 난 너에게 무엇이었을까? 어떤 모습으로 널 만나고 있었을까?

그래. 뼈아프게 반성하자. 반성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만이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는 후회가 없도록 하자. 아니 또다시 후회하더라도 돌이켜 다시 시작해보자.
시간을 헛되어 보냈다는 것. 학교를 부끄러워했다는 것. 선배와의 만남 같은 것을 소홀히 했다는 것. 이 모든 것에 대한 쓰라린 후회만이 희망일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난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고등학교의 학창을 통해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유의 주체가 되어주기를 바랬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지금의 너의 모습처럼, 너를 돌아보고 쓰러진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이제야 너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런 자기 생각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어쩌면 허공에 돌을 던지듯이 너희들에게 그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포기해버렸을 수도.. 바로 그 점이 지금 나를 많이 후회스럽게 한다. 왜 한 번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왜 한 번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했을까?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지식들이 성적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전락하지 않고 너희 가슴속에서 살아 있기를, 그런 교사가 되기를 계속 꿈꾸지 않았을까?

너의 편지가 치졸하기는커녕, 나에게도 소중한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네게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제 다시 시작해보자. 네가 아직 배움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세상을 다 주고 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네가 소유하고 있는 그 '젊음'이다. 나는 네가 취직을 위해서 공부하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어른이 되어 한 번 더 후회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대학교육은 취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취업은 풍성하고 성실한 대학생활의 당연한 결과로서 오는 것이니까.

지금의 학교 교육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성실한 학창의 결과로서 대학입학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입학만을 위해 고교시절이 존재한다는 것. 이런 교육의 가치전도가 그 동안 너희들이 폭넓게 사유하고 행동하는 아름다운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의 삶을 너무도 치졸하고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주 너의 편지를 받고 싶구나. 제자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마도 넌 모를 거야. 끝으로 폭넓은 독서와 여행을 권하며, 그리고 후회 없이 너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것을 바라면서 이만 부족한 글을 줄인다.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제자의 실명을 대신해서 k라고 썼습니다.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는 제자의 모습에서 오히려 희망을 느끼면서, 우리 교육도 뼈아픈 자기성찰의 시간들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외국 영화를 보면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수업내용에 대하여 토론을 하거나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부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부끄러운지. 우리도 한 때는 그런 살아있는 토론식 수업을 했었지요. 보충수업이 강화되면서 정상수업에서도 그런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버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상급관청에서는 그런 살아있는 수업을 하라고 공문이 내려오기도 하지만... 제자의 편지를 통해 뼈아픈 자기반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자의 실명을 대신해서 k라고 썼습니다.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는 제자의 모습에서 오히려 희망을 느끼면서, 우리 교육도 뼈아픈 자기성찰의 시간들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외국 영화를 보면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수업내용에 대하여 토론을 하거나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부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부끄러운지. 우리도 한 때는 그런 살아있는 토론식 수업을 했었지요. 보충수업이 강화되면서 정상수업에서도 그런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버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상급관청에서는 그런 살아있는 수업을 하라고 공문이 내려오기도 하지만... 제자의 편지를 통해 뼈아픈 자기반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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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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