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한국불교사 솔직한 서술

이이화 <역사속의 한국불교>

등록 2003.02.19 23:54수정 2003.02.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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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지 지금까지 대략 17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변천해 왔는지, 그리고 그 공과는 무엇인지를 따져 보는 것은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까닭은 문화유산 답사를 나서거나,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를 살펴보더라도 불교는 우리 가운데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한국불교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다는 반성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단순히 불교 사상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한국불교가 걸어온 숨김없는 역사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문 투성이에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는 수많은 불경들, 또한 전문인 아닌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불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다.

그런데 역사학자로서 한국사의 대중화에 힘써온 저자가 복잡한 사상사가 아니라 사회사적, 민중사적인 관점에서 한국 불교사를 다룬 이 책을 내놓은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찬미 일변도의 불교사 서술이 아니라, 솔직한 한국불교의 역사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그가 생각하는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도 제시해 두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이후 많은 왕들이 불교를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적극 받아들인다. 그들은 중국의 제왕들이 사용해먹던 방식으로 "왕이 곧 부처다"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내세워 귀족들을 숙청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부처님처럼 섬기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긴 세월동안 신앙해온 무속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불교로 귀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자 승려들은 죽은 자에게 재를 올리거나 복을 비는 기복적인 요소나 병이나 재앙을 물리쳐달라는 주술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무속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시도한다. 요컨대 초기불교가 수용될 때부터 무속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불교 본래의 사상과는 상관없이 무속적인 요소가 뒤섞였다는 말이다. 이러면서 불교는 대중 속에 널리 자리잡을 수 있었고 왕즉불 사상 등으로 호국불교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왕즉불 사상이나, 호국불교라는 한국불교 이미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호국불교나 기복신앙은 불교의 본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평등, 평화, 인권과는 상관없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역사적으로 한국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교로서 화려한 지위를 누리는 동안 이런 고유의 정신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였다. 지눌의 정혜결사나 백련결사 등 치열한 반성과 자정노력이 있었으나, 이런 신앙 결사운동마저 몽골 침략기부터 침체에 빠졌고 후에는 변질되고 타락한 나머지 어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단으로 만든 승려 예복을 예사로 걸쳤고, 경비가 많이 드는 단청이 유행했으며, 팔만대장경과 같은 거창한 국가사업을 주도할 정도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불교는 고려후기에 이르러 유학자들의 성리학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조선시대에는 급기야 정도전 같은 유학자 등을 중심으로 "불교는 인륜과 도덕을 저버린 허무적멸(虛無寂滅)의 가르침"이라는 혹독한 비판이 쏟아졌다.


유학자들은 앞다투어 불교를 이단으로 몰았고, 쇠락한 불교는 이에 적절히 응수하지 못한 채 마침내 대세를 유교에 넘겨주게 된다. 이때 이후로 왕들의 개인적인 불교에 대한 신앙심과는 상관없이 국가통치 이념은 유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그 중에 황해도에서 향시를 볼 때 일어난 웃지못할 사례 한 가지를 들어보자. 마침 역질이 나돌 때라 그 대책을 묻는 시험문제가 나왔는데, 향교의 훈도인 한 응시자가 별 생각 없이 "불공을 드리면 구할 수 있다"는 답안지를 냈다고 한다. 시험관은 이를 보고 선비의 기풍을 개탄하여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다. 보고를 들은 성종은 그 응시자를 가두고 문초한 뒤 변방으로 유배 보낸 다음, 이에 더하여 『경국대전』에 도첩제를 없앤다는 조항을 새로 넣도록 지시 하였다.

그동안 가뜩이나 승려수를 제한당해왔는데, 이제는 국가 공인을 받으면 승려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마저 막혀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과거시험에 이단을 조금이라도 찬양하면 합격시키지 말라는 규정도 새로 생겼다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절들은 텅텅 비었고 도첩이 없는 승려들은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개화기엔 승려 이동인과 탁정식의 활약이 돋보였고, 일제시대의 친일불교가 득세하는 중에도 한용운 같이 독립운동과 불교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종교단체보다 자발적 친일부역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심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그런데 이런 불교계의 친일행위에 대해 정화를 제기한 자가 미국을 등에 업고, 많은 친일파를 자기 하수인으로 부렸던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비극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승만은 당시까지 일본불교를 흉내내며 기득권을 쥐고 있던 대처승들을 사찰에서 몰아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바로 이때부터 불교계에 대처승과 비구승간의 깡패를 동원한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상처와 여진이 아직도 말끔히 정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터지자 조계종단에서는 구호봉사단과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총무원은 용감하게 전두환 지지성명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일로 신군부의 미움을 사서 10·27 법난을 맞는다.

원로와 일반승려, 신도 등 무려 55명이 연행되었고 98명이 조사를 받았으며 이중에 18명이 구속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계 전체가 일치 단결하여 반정부 운동에 떨쳐나선 것은 아니었고, 신군부 하에서도 종단 내부 분규 사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한편, 군부독재 하에서 점차 젊은 불자와 승려들을 중심으로 민중불교 운동이 일면서 민주화와 사부대중의 복지와 인권을 위한 거센 운동이 일어난 뒤 오늘까지 이어지고 것은 지금의 한국불교에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을 안겨주는 대목으로 보였다.

저자는 불교계가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큼직한 도량에 안주하기보다는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고통 속을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고 평화와 상생의 종교로서 자리 매김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기나긴 역사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민중들의 삶과 고통을 외면하면 값비싼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역사 속의 한국불교

이이화 지음,
역사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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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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