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애를 찍었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9>큰딸이 치른 선거

등록 2003.03.13 13:05수정 2003.03.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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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올해 학교신문 편집국장으로 선출된 큰딸 푸름이

올해 학교신문 편집국장으로 선출된 큰딸 푸름이 ⓒ 이종찬

"여보세요?"
"저예요"
"왜?"
"전화 걸 때마다 왜라는 그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를 해야 돼요?"
"......"
"푸름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학교신문 편집국장에 뽑혔대요"
"그으래. 축하한다고 전해"
"나중에 전화하라고 그럴게요"


올해 초등학교 최고 학년이 된 큰딸 푸름이가 "토월어린이" 이란 제호로 매주 한번씩 나오는 학교신문 편집국장에 뽑혔다는 전화가 아내로부터 왔다. 편집국장이라. 아내의 전화를 받은 나는 큰딸이 학교신문 편집국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기쁘다는 생각보다도 마음이 착찹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서울에서 내려온 이후 지방에 있는 모일간지 문화부에서 제법 오랫동안 데스크를 보았던 적이 있었고, 현재에도 언론사에 다닐 때처럼 거의 매일 한 꼭지씩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고 있고, 그 기사를 몇몇 인터넷 신문에 재수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편집국장이라. 언론사에서 편집국장이라고 하면 흔히 신문사의 꽃에 비유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언론의 꽃이 편집국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국장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됨과 동시에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크다. 또 편집국장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그 신문사의 경영에도 전혀 무관심할 수가 없다.

특히 편집과 경영이 독립되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지방 일간지에서는 편집국장을 맡는다는 것, 그 자체가 곧 그 지방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는 그런 자리에 앉는 것이라고 했다. 또 이는 내가 한때 지방의 모일간지에서 문화부 데스크를 보았기 때문에 그 내막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이기도 하다.

"아빠! 내일 편집국장 선거날이야. 근데 이상하게 떨리는 거 있지"
"왜 떨려? 너가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아냐. 지난번에 아빠가 말했잖아. 만약 편집국장이 되면 그에 따라 열심히 하면 되고, 편집국장이 안되면 편집국장 보다 더 열심히 기사를 쓰면 된다고"


기왕 큰딸 푸름이 얘기가 나온 김에 잠시 큰딸 자랑을 좀 늘어놓아야겠다. 팔불출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입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또한 큰딸의 평소 글쓰는 실력을 조금 알려놓아야 이번 편집국장 인선이 참으로 공정(^^)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큰딸 푸름이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세 살 때부터 글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더니, 네 살 때부터는 웬만한 동화책을 하루에 두세 권씩 읽어냈다. 그 때문에 큰딸 밑으로 들어간 책값만 해도 엄청(?)나다. 또한 큰딸이 지금까지 읽은 책만 해도 웬만한 마을도서관 하나 정도는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 큰딸 푸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모두 나가서 상을 휩쓸고 오는 것이었다. 오죽 했으면 아내가 "상 좀 그만 타 와라"고 할 정도였고, 작은 딸 빛나는 학교 조회 때 언니가 무슨 상을 탈 때에는 아예 박수를 치지 않는다고까지 했으니까.

"아빠! 나 커서 뭐가 될까?"
"그건 너가 알아서 판단해야지. 아빠는 너에게 무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그냥 너가 가장 관심이 많고 하고 싶은 그런 일을 해야겠지?"
"방송기자나 신문기자를 할까? 아니면 아빠처럼 시인이나 작가가 될까?"
"아직 그리 급한 것은 아니니까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잘 생각을 해 봐. 너 자신이 어디에 가장 소질이 있고 재미있어 하는지"

큰딸 푸름이는 초등학교 오 학년에 접어들면서 학교 신문기자 모집에 응모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수습기자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푸름이는 매주마다 집으로 학교 신문을 가져와 나더러 자신이 쓴 기사를 읽고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으레 아빠, 다음 주에는 무얼 쓸까, 라고 물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푸름 기자> 란 기명이 붙은 큰딸의 기사를 읽기 싫어도 읽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 실려 있는 그런 기사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이거 너가 직접 쓴 거 맞아, 혹시 인터넷 같은 곳에서 베껴쓴 거 아냐, 라고 물으면 푸름이는 아빠는 아빠 딸을 어찌 보고 그런 말을 해, 하면서 펄쩍 뛴다.

"아빠! 나랑 합쳐서 모두 다섯 명이 편집국장에 출마했거든. 근데 남자애 둘은 인기가 없어서 안될 것 같고, 여자애 하나는 실력이 모자라. 근데 나머지 한 애랑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어"
"애들은 너를 많이 지지해?"
"응, 애들은 대부분 나를 지지해"
"그래. 그래도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속상해하지도 말고"

a 태종대 앞바다를 향해 힘껏 돌팔매질을 하는 이푸름

태종대 앞바다를 향해 힘껏 돌팔매질을 하는 이푸름 ⓒ 이종찬

학교 신문 담당 선생님을 포함해 12명이 치른 학교 신문 편집국장 선거에서 큰딸 푸름이는 6표를 획득해 당당하게 편집국장에 당선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아내에게 편집국장 당선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나한테는 일단 엄마가 알려주고, 저녁에 따로 전화한다고 하면서.

"아빠! 얘기 들었어?"
"응, 그래 축하한다"
"근데 걔가 불쌍해 죽겠어"
"누구?"
"나랑 처음 출마할 때부터 경쟁을 했던 걔 말이야. 한 표밖에 못땄거든"
"그럼 너도 널 찍었어?"
"아니, 나는 다른 애를 찍었어"
"잘했어. 그랬다면 너가 과반수 이상 획득을 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날 나는 큰딸 푸름이에게 학교 신문 편집국장으로서 지켜야 할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신문사에 들어오는 재학생들의 원고는 어떠한 원고라 하더라도 일단 모두 성실하게 접수하고, 학생기자들이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늘 뒷받침해 주는 심부름꾼이 편집국장의 역할이라고.

또 학생기자와 재학생들이 제출한 기사에 대해서도 늘 기자들과 함께 토론한 뒤 기사로 채택하고, 채택된 기사의 지면 배치를 네 맘대로 하지 말라고. 그리고 남의 원고를 베낀 것은 신문에 싣지 말고, 만약 실을 경우에는 그 기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반드시 밝힐 것이며, 친한 사람의 원고라고 해서 우선적으로 다루지 말고 공정하게 하라고.

물론 초등학교 주간신문은 우리 어른들이 읽고 있는 일반 신문과는 다를 것이다. 또한 학교 신문 편집국장이라고 해서 담당 선생님의 허락도 없이 원고를 마음대로 뽑고 마음대로 게재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편집국장의 역할은 마치 지방 일간지의 사주처럼 신문 담당 선생님이 하실 것이므로.

축하한다. 이푸름 편집국장님!
하지만 이제부터 내 어깨는 예전보다 훨씬 무거워질 것이다. 이제는 너 하나가 아닌 많은 학생기자들과 재학생들이 너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신문은 아이들의 신문다워야 한다는 것을 늘 되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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