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판타지 소설을 읽었습니다

갓 핀 목련 같은 아이, 은영

등록 2003.03.20 04:28수정 2003.03.2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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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출근길에 만난 목련

출근길에 만난 목련 ⓒ 안준철

처음으로 판타지 소설을 읽었습니다. 끝까지 읽지는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사실은 우리 반 은영이와 책을 교환하여 읽기로 한 것입니다. 은영이는 제게 판타지 소설을 한 권 권해주었고, 저는 은영이에게 학교 도서관에 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권해주었습니다. 그 책을 건네면서 끝까지 읽어야한다고 말한 것은 저였는데, 은영이는 약속을 지키고, 저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러 가던 그날, 긴 복도를 걸어가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서자 맨 앞자리에 갓 핀 목련 한 송이가 피어 있는 듯 했습니다. 은영이는 책을 읽다가 저를 보더니 책을 덮었는데 그 시간이 조금 길었습니다. 뭔가 아쉬움이 있는 듯 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구나 싶었고, 그 첫 인상이 깊게 남았습니다.

점심시간에 교실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렸는데 그때도 은영이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무슨 책일까 궁금해서 제목을 확인해보니 판타지 소설이었습니다. "재미있니?" 하고 물어보니까 "전 판타지 정말 좋아해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판타지를 주로 읽니?" 하고 다시 물어보니 피식 웃으면서 "예"하고 짧게 대답을 했습니다.

5년 전쯤의 일입니다. 수업 중에 한 아이가 시집을 읽고 있어서 야단을 칠 생각보다는 내심 반가운 마음에 제목을 확인해보니 이른바 '낙서시집'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집을 보자마자 다소 흥분된 어조로 "이런 것은 시가 아니야!" 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여서 그런 과민한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반응도 거칠었습니다.

"왜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고통 없이 쓴 것은 낙서지, 시가 아니야."

그 다음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기억이 확실한 것은 그 날 이후 그 아이와의 만남이 서먹해졌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문학에 관한 생산적인 대화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가 어디선가 문학수업을 계속 받았다면 지금쯤은 '낙서시집'의 실체를 파악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출판사의 상술이 청소년들의 영혼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공감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다 보면 흥분을 잘하는 얼치기 시인 선생님의 과민한 반응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을 지도.


하지만 그날 저의 단정적인 말 한 마디로 인해 대화가 단절되어 버린 그 손실을 만회할 방법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 후회가 되는 것은 그가 스스로 더듬어 찾아갈 길을 제가 훼방한 것은 아닌가하는 점입니다. 다행히도 그런 과거의 미숙한 행동들이 저를 단련시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너, 판타지 소설 그만 읽어라" 라고 말하지 않고,
"나도 판타지 소설 한번 읽고 싶은데, 대신 넌 선생님이 권해준 책을 읽지 않을래? 그리고 우린 메일로 소감을 서로 나누면 어떨까?"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은영이가 자신의 생일 전날 써 보낸 소감문입니다.



선생님!
저 은영이요! 드디어 제 생일이 바로 내일이네요!
벌써 제 생일이 돌아오다니!
1학년 땐 언제 내 생일이 오나 생각하고 그랬는데

아! 선생님!
저 다 읽었어요! 약속 지켰습니다!^^
느낌!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철이 들어서 철이 든 만큼 맘에 상처를 달고 다니는 제제...
너무나도 맘이 아프고 한편으론 제제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을 보면 제가 부끄럽고...
나이 맞게 행동들을 했음 하는 바람에 있었고...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고...심지어 마을 사람들한테도 미움을 받는 제제지만 항상 포기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보다 더 착하다고 생각하고 걱정들도 많이 해주는 제제...
그러나 상처는 그대로 가지고 사는 어린 남자..
이 책은 너무나도 감동을 주는 책이고 한편으론 제 자신이 넘나도 부끄럽고 한심스럽다...
난 나이를 먹은 만큼 먹었으면서도 철은 전혀 안 든 나...내 자신이 너무 싫다...

선생님! 이게 제 느낌이고요...^^
역시 판타지소설보다는 이런 책들이 더 좋아요!!!^^
감동도 더 많이 받고 교훈도 많이 받았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다음은 제가 은영이에게 보낸 메일 편지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벌칙으로 조금 길게 썼습니다.


지금은 2003년 3월 19일 밤 11시 55분. 5분이 지나면 너의 생일이구나. 생일을 축하한다. 넌 약속을 지켰구나. 선생님은 약속을 못 지켰단다. 어제, 오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결국은 못 지켰어. 미안하구나. 책이란 처음에는 진도가 잘 안 나가다가도 책장을 넘길수록 빠져드는 법인데 (넌 아마도 그랬던 것 같은데..) 선생님은 그 반대였단다.

처음엔 풍아, 수아, 지토 등의 이름들이 참신하고, 그래서 조금은 흥미가 있을 것 같았는데 갈수록 책 속에 빠져 들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책을 덮을까하다가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하고 억지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단다. 판타지 소설을 처음 대할 때는 일단 재미는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그래서 오랜만에 흠뻑 재미에 빠져 볼 생각이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단다.

솔직히 말할게. 단 한 페이지도 단 한 줄도 가슴을 울려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지루하기만 했어. 내용이 황당하다든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여서도 아니야. 우화나 환상을 소재로 다루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까 <어린 왕자>나 <갈리버 여행기>가 바로 그런 책이지.

한 마디로 기본적인 문장력이나 소설을 전개해 가는 솜씨 등이 너무도 초보적인 수준이거야. 한 번에 몇 줄씩 건너뛰어 읽어도 괜찮은 정도로 느슨한 글들이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 책을 내기 위해서 억지로 짜낸 이야기들이 읽어주기에는 너무도 고역스러운 거야. 아무튼 미안하구나.

은영아.
넌 그 시간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있었겠지. 약속을 지켰으니 네가 선생님보다 훌륭하다. 그리고 약속대로 소감문까지 보내주었으니 말이야. 처음 널 만났을 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단다. 너의 깨끗하고 밝은 인상하고 너무도 어울렸지. 그런데 그 책이 판타지였지.

난 생각했어. 혹시 내가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야. 네가 그렇게 즐겨 읽는 책이라면 나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거야. 너를 알기 위해서는 판타지를 읽어 봐야할 것도 같았고. 또 너의 생일이 곧 다가오는데 널 좀더 알아야 시를 쓸 것도 같았지.

그래서 책을 교환해서 읽자고 제안했던 거야. 처음에는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소개해주려다가 다음으로 미루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권해주었는데 재미있게 읽었다니 참 다행이다. 나도 어른이 되어 아들과 함께 그 책을 읽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거든. 그리고 이번 기회를 계기로 해서 너의 독서습관에 변화가 올 것도 같아서 기쁘구나.

언젠가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선생님에게 100억을 주면서 대신 책을 보지 말라고 하면 그 제안을 거절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이야. 아마도 그 책이 판타지 소설이었다면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을 거야. 이제는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제제와 또또까와 밍기뉴를 만났으니. 그리고 제제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버지 뽀루뚜까를 만났으니.

바로 그거란다. 좋은 소설은 인물 창조를 하지.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내 영혼에 심어주는 거지. 제제는 조숙하고 슬픈 아이였지만, 어쩌면 그 슬픔이 제제를 위대한 작가로 키웠는지도 몰라. 물론 슬픔만은 아니야. 뽀루뚜까의 사랑이 그를 키운 거지.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 제제가 바로 작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왜 그렇게 소설이 슬플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주제가 그런 거였어. 제제가 경험한 슬픔과 사랑이 그를 함부로 살게 하지 않은 거야. 너도 아마 그럴 지도 모르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의 다짐을 하게 될지도. 넌 제제의 삶을 생각하면서 네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생각되었고 했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몰라. 그 순간이 바로 너의 영혼이 한 뼘 더 자라나는 아름다운 순간이니까..

자 너에게 글을 보내고 이제 내일(아니 오늘이네) 너에게 줄 생일 축하시를 써야겠다.
그럼 안녕!


갓 핀 목련 같은 아이, 은영


기억난다
너를 처음 만나던 그날
긴 복도를 걸어
문을 열고 들어가
너무도 어여쁜
갓 핀 목련 한 송이를 보았지

첫날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넌 정신없이 책을 읽다가
눈을 떼기가 아쉬웠는지
서너 줄을 마저 더 읽고는
사슴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며칠이 지나 메일 편지가 오고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답장을 하고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지
그리고 그 만남은 깊어졌지
난 너에게 넌 나에게
책 한 권씩을 권해줄 만큼

단 한 권의 책이었지만
그건 마치 서로의 영혼을 교환하는 것 같았어
나는 너로 인해
풍아, 수아, 지토를 알게 되고
넌 나로 인해
제제, 밍기뉴, 뽀르뚜까를 알게 되고

이 작은 시작이
이 작은 한 방울의 물이
큰 강물을 이루어 바다로 향하게 되기를
너의 생애가, 너의 영혼이
세상 아름다움을 향하여 열려지기를
아이야, 갓 핀 너의 해맑은 미소가
낮은 땅에서 꽃피어지기를!

2003년 3월 20일
사랑하는 은영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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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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