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댐공사와 '33일간의 단식'

우리가 먹은 건 밥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등록 2003.04.11 15:31수정 2003.04.1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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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보길도 댐 건설 반대를 위한 단식을 벌인 강제윤 시인

보길도 댐 건설 반대를 위한 단식을 벌인 강제윤 시인 ⓒ 오마이뉴스 강성관

단식 33일째, 이제 단식을 멈추고자 합니다. 처음 단식을 시작할 할 때는 보길도 댐 공사를 백지화시키기 전까지 결코 단식을 풀지 않겠다는 각오였는데 세상일이 마음같이 되지만은 않는군요.

물론 댐 공사에 191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는 환경부로부터 백지화는 아니지만 전면 재검토 약속을 끌어냈고 완도군과 주민 대책위가 검토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으니 처음 뜻의 절반쯤은 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또 주민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있던 완도군을, 비록 환경부의 요청 때문이기는 하지만 대화에 응하게 만든 것도 적지 않은 진척일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낮에는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님이 보길도를 방문해 검토위가 공정하게 가동되도록 관심을 갖겠으니 우선 가서 단식을 풀게 설득하라 했다는 대통령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수석님 또한 검토위원회 활동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돕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었으니 이 또한 반가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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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 해서 상황이 전적으로 낙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한명숙 환경부 장관님은 재검토를 지시했으나 완도군과 환경부 일부 관료들이 댐 공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어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눈앞에는 여전히 지난한 싸움의 길이 놓여 있고 나는 그 길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싸움이란 아주 손쉬운 싸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굶어준 것밖에 한 일이 없으니 말이지요. 이제 댐 증축 공사여부는 전적으로 검토위원회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공은 검토위원회로 넘어갔고 검토위원회 활동을 통해 댐 증축 백지화를 끌어내기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동안 내가 치러내야 할 싸움은 지금까지보다 더 치열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단식을 푸는 마음이 편치 않지 않지만 풀 수밖에 없습니다. 지친 몸 추스리고 그 동안의 작은 성과를 바탕으로 더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요.


부용리 마을 회관에 거처를 정하고 곡기를 끊은 날들이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어갔습니다. 회관 앞 들녘, 청보리들의 키도 부쩍 컸습니다. 단식의 시간 동안은 거칠 것 없었으니 나의 몸도 마음도 모두가 편안했지요. 어떤 이들은 내 건강을 염려하여 단식이 길어지는 것을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오래 굶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신념으로 살고, 열정으로 살고, 사랑으로 살기도 합니다. 다만 신념을 갖기가 어렵고 열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따름이지요.


부산의 비구니 지율 스님은 38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여 산의 몸뚱이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막아내지 않았습니까. 서준식 선생님은 감옥에서 무려 51일간의 단식으로 사회안전법을 철폐시키지 않았습니까.

또 1981년,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던 북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은 감옥에서 '정치적 확신범'으로 인정받기 위해 무기한 단식 투쟁을 하다가 무려 열 명이나 차례로 굶어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미 제국주의자들과 더불어 지금 수많은 이라크 민중들의 생목숨을 도륙하고 있는 영 제국주의자들의 간악함이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닌 것이지요.

결국 영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IRA 회원 바비 샌즈(Bobby Sands)는 66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스물 일곱 나이로 생애를 마쳤고, 뒤이어 아홉 명의 젊은이들이 짧게는 46일에서 길게는 73일 동안이나 단식 투쟁을 벌이다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목숨이란 그토록 모질고도 질긴 것입니다. 이들의 생애를 건 투쟁에 비하면 나의 단식은 아주 소박한 싸움에 불과했습니다.

아주 긴 단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단식 날짜가 제법 길어지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흔히들 3일 굶으면 남의 집 담 안 넘을 사람 없다고 합니다. 옛날 기근이 들었을 때는 열흘 굶은 사람이 인육까지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나도 그런가 보다 했었습니다. 굶주리면 사람 또한 맹수와 무엇이 다르랴 했습니다. 단식의 경험은 많으나 이십 일이 넘는 단식은 처음이었기에 나도 처음에는 걱정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33일 째 단식에 이르도록 내 몸은 거뜬합니다. 이 상황에까지 오자 비록 신념이 있고 열정이 뒷받침해주었다고 하지만 하나의 의문이 머리를 내미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33일, 아니 그 이상을 물만 먹고도 견뎌낸 사람도 많은데 3일 굶고 도둑질을 하고, 열흘 굶어 사람까지 잡아먹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오래 굶고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은 신념과 열정 말고도 아주 특별한 무엇을 타고난 사람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30일, 40일 굶고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특별난 것이 아니라 3일 굶고 담을 넘는 사람과 열흘 굶고 인육을 먹은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당연시하는 사회가 또한 비정상적인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동안 먹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과연 밥이었을까요, 몸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양분이었을까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그것은 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댄 것은 실상 밥이 아니었고, 몸에 필요한 양분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귀처럼 먹어댄 것은 바로 욕망이었습니다. 양분이 아니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담 넘어 도둑질을 했고 사람을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들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욕망을 지배하며 살지 못하고 욕망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면 이 세계는 지금보다 만 배쯤은 더 평화로워 지겠지요. 그러면 전쟁 따위도 사라지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가치는 욕망의 사슬을 끊고 스스로 가난해지는 일, 곧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영·육이 모두 자발적 가난을 택하여 사는 일 입니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것이 아닙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망상 속에 사는 것보다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이상이 더욱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보길도의 댐 증축 시도 또한 이런 부질없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안정적 물 확보보다는 토목업자들의 이윤 추구를 위해 댐 위에 댐을 쌓는 것은 썩은 욕망에 욕망을 덧칠하는 분탕질에 불과합니다. 끝없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러한 욕망들이 이 땅의 구석구석을 파괴해 왔고 보길도를 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댐 공사를 막는 일은 이 무섭도록 추악한 욕망의 순환고리를 끊어내는 정신적 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댐 공사를 막고 난 이후에도 계속 될 것입니다.

a 지난 3월 27일 주민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보길면 청별항에서 진행된 주민 궐기대회

지난 3월 27일 주민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보길면 청별항에서 진행된 주민 궐기대회 ⓒ 오마이뉴스 강성관

그 동안 나의 단식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주고 동지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아내와 대책위 사람들, 우리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창립된 보길사랑공동연대, 1인 시위까지 해가며 도움을 준 풀꽃세상회원들, 환경운동연합 관계자들, 또 일면식도 없지만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구십 노구지만 정신은 영원한 청년이신 강원용 목사님, 멀리 미국에 살면서도 조국의 외딴 섬 마을의 투쟁에 누구보다 큰 힘을 보태주신 차인혁 선생님께 깊이 머리 숙입니다. 환경련의 염형철 선생님, 아주대 박옥걸 교수님, 풀꽃평화연구소의 최성각 선배님, 천주교인권위의 오창래 선생님께도 고마움 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길도 댐 공사의 문제점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큰 힘을 모아준 참 언론 <오마이뉴스>에 특별한 애정과 경의를 표합니다. <오마이뉴스>가 아니었으면 보길도 댐 문제는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진실을 보도해 준 <한겨레신문>, <전라도닷컴>, <자연 환경신문>, SBS '물은 생명이다' 제작팀, CBS 시사자키,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 목포와 광주의 KBS, MBC, CBS 등 지역언론에게도 보길도 주민들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싸움에 인사가 길다고 탓하진 마십시오. 도움 준 모든 이들을 보길도 지킴이로 계속 붙들어 두고 싶은 작은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들 보길도 댐 증축 공사가 완전 백지화 될 때까지 끝까지 도와주고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잠시 관심을 놓고 경계를 늦추는 순간 그 동안의 모든 성과를 무로 돌릴 수 있을 만큼 부패한 관료집단과 토목 마피아들의 힘은 막강하기만 한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이라크 전쟁중이라 해서 이들의 암약이 멈추지는 않습니다. 나의 단식은 끝났지만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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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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