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 오면 흰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 타련다

항일유적답사기 (12) - 두만강

등록 2003.05.05 19:16수정 2003.05.0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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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제1차 1999년 8월 1일부터 8월 11일까지, 제2차 2000년 8월 17일부터 8월 22일까지 두 차례 중국대륙 여기저기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이를 토대로 2000년 9월에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는 단행본을 펴낸 바 있었다. 이번에 다시 이를 다듬고 깁고 보탬질하여 <항일유적답사기>를 50회 정도로 연재하고자 한다...<기자 주>

a 겨레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만강 물은 쉬엄쉬엄 흘렀다

겨레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만강 물은 쉬엄쉬엄 흘렀다 ⓒ 박도

눈물 젖은 두만강


연변대학 빈관 구내 찬청(餐廳: 식당)에서 빵으로 요기를 하고 곧장 답사 길에 나섰다. 역 앞 주차장에서 조금 전 우리를 태워 준 조선족 허영철 기사의 승용차를 타고 도문으로 향했다.

이 일대는 우리나라와 국경이 가깝고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탓으로 이국이란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도문으로 가는 산기슭 내리막길에서 머리를 박박 깎고 윗통을 죄다 벗은 30여 명의 장정들이 삽과 괭이로 하수도를 보수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몸통이 볕에 거슬려 온통 까맣다. 보통 노동자는 아닌 듯했다. 허 기사가 죄수들이라고 했다.

어느 사회나 범법자는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러 수감 생활을 한 지는 모르겠으나 잔뜩 찌든 표정이라 어쩐지 연민의 정이 갔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들 곁에는 간수인 듯한 사내가 두어 명이 그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연길을 출발한지 미처 한 시간도 안 돼, 허 기사는 북한 땅이 바로 코앞인 두만강 강가에다 내려 주었다.


a 두만강 다리 건너 국경초소, 8월의 뙤약볕 아래 고즈넉했다.

두만강 다리 건너 국경초소, 8월의 뙤약볕 아래 고즈넉했다. ⓒ 박도

강 건너 산하는 분명 내 나라요, 그곳으로 가는 다리가 있어도 건너지 못하고, 중국인들이 얄팍한 장삿속으로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돈을 내고 올라갔다.

거기서 내 조국 산하를 바라보는 나그네의 마음은 마냥 아프기만 했다. 내가 설핏 본 탓인지는 몰라도 국경지대지만 요란한 경비도 없고, 북한 지역은 인적이 보이지 않는 매우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강 건너 마을에 사는 수많은 동포들이 몇 년째 끼니조차 허덕인다니 마음이 더욱 아렸다. 중국 도문과 북한 남양을 잇는 다리와 철교는 두만강을 가로질렀고, 그 다리 아래로 강물만 민족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저 쉬엄쉬엄 흘러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애창하는 대중가요〈눈물 젖은 두만강〉의 바로 그 눈물의 강이다. 지난날 일제 탄압에 못 이겨 조국을 등진 백성들의 애환이 담긴 단장의 강이다.

두만강과 북한 산천을 바라보는 전망대 일대에는 잡상인들이 들끓었다. 조선족, 한족 장사꾼들은 우리 일행에게 떼거리로 달려들면서 한국 돈도, 달러도, 다 좋다고 나그네의 소매 깃을 잡았다.

우리의 분단을 이웃 나라들은 즐기는 양, 그것을 이용해서 관광지로 만들어 외화벌이를 하고 있었다. 이런 희비극이 언제 멎을 터인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썰매를 탔던 시인 김규동은 통일의 그 날이 오면,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 놓아 울고 난 뒤에, 흰머리 날리며 그 썰매를 타고 싶다고 했다.

백발을 날리는 아흔의 시인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에서 개구쟁이 소년처럼 썰매를 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그분의 간절하고도 소박한 꿈이 당신 생전에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두만강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a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잇는 다리, 내 조국 산하를 빤히 보면서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잇는 다리, 내 조국 산하를 빤히 보면서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 박도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 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강 건너 개 짖는 소리 아직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 놓아 울고 나서
흰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보련다.
― 김규동 〈두만강〉


a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잇는 철교. 다리 중간을 경계로 흰색 부분이 북한을, 검은 부분이 중국임을 표시하고 있다.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잇는 철교. 다리 중간을 경계로 흰색 부분이 북한을, 검은 부분이 중국임을 표시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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