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정원 한라산 기행 1

산세가 아름다운 영실계곡

등록 2003.05.19 08:33수정 2003.05.1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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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세 ⓒ 김강임


한라산의 아침은 이름모를 산새들의 천국이었다.
노루가 뛰노는 신의 정원. 은하수를 잡아 당길만큼 높은 산. 그 산을 가기위해 벌써부터 영실 입구에는 자가용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해발 1280m. 한라산 영실 휴게소 입구에는 아름드리 하늘을 향해 뻗은 적송지대가 펼쳐졌고, 계곡에서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다. 아직 잠에서 덜깬 사람들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로 세수를 하고, 두 손으로 물을 받아 목을 축인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든 산행의 시작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곳에서 보면 하늘은 아주 쪼끄맣다. 그저 앞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 가면 길이 보일 뿐.

해발 1400고지부터는 돌계단의 급경사가 등산객들을 기다린다. 어찌 산이 평탄할 수만 있으랴마는 숨을 헐떡이며 오르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벌써부터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이제부턴 산행의 순서가 바뀌는 코스다. 앞서갔던 사람들은 힘에 겨워 돌 계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초등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자기와의 싸움에 도전한다. 한치 앞서가던 남편이 뒤따라 오는 내가 힘겨워 보였던지 뒤로 손을 내민다. 얼마만에 잡아보는 따뜻한 손인가?

힘들고 지쳤을 때마다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이 늘 고마웠지만, 날마다 메일로 쓰는 편지속엔 투정만 늘어 놓았다. " 일찍오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라는 잔소리도 오늘 한라산에서만은 잊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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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철쭉 ⓒ 김강임

돌계단을 오르면 영실기암의 절경이 전설처럼 펼쳐진다.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은 병풍바위가 겨울 바람을 막아주 듯 딱 버티고 서 있다. 500여개의 돌기둥이 하늘을 치솟아 감아주는 이 기암괴석을 오백나한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함성을 지르거나 고함을 치면 오백개의 기암괴석들이 짙은 안개를 피어 오르게 하여 사방을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는 전설이 있다.

다행히도 오늘따라 아무도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으니 평소 안개가 많던 이 지역이 금방 손으로 잡아볼 수 있을만큼 선명하다.

해발 1500고지에 오르니 은하수를 잡아 당길만큼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와 있는 느낌이다. 잠시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니 그 길은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한눈에 보이는 오름과 바다. 오백나한이 마치 이 내 영혼처럼 살아숨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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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잇는 등산객 ⓒ 김강임

많은 사람들이 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돌계단 틈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봄꽃들은 상처 하나 없다. 기암괴석 사이로 피어있는 산철쭉들이 유난히 생기가 돋는다. 신선들이 산다고 하여 영주산이라 불리는 한라산은 윗세오름 사이로 크고 작은 오름들과 계곡이 해양까지 뻗어 섬을 이룬다.

한라산을 창조했다는 전설의 여신인 설문대 할망. 백록을 타고 유유자적 했던 신선. 불국토의 땅을 찾아 수만리 여정의 길을 걸었던 석가의 아라한. 진시황제가 한라산으로 사신을 보내 불사의 명약을 구해 오게 했다는 전설도 이 한라산만이 지닌 전설속의 이야기다.

해발 1600고지에 오르면서부터는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이 바람은 어디서 왔을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걸었던 사람들도 한숨을 쉬며 모자를 다시 쓰기도 하고 머리를 가지런히 챙기기도 한다.

구상나무 무리가 맑은 공기를 전해주 듯, 심호흡을 하니 간장이 써늘하다. 깔아놓은 자갈길을 따라 구상나무 숲에서 벗어나니 진달래 꽃의 초원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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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를 꽃들 ⓒ 김강임

"1주일만 빨리 왔었더라면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앞서가는 관광객들의 아쉬움 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또 앞에 펼쳐진 작은 동산인 '선작지왓'은 또 하나의 전설을 낳는 듯 경이롭기만 하다. 언제보아도 아름다운 이 길을 오늘 또 걷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노루샘에서는 줄을 지어 땀방울을 씻어내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미처 동이 트기 전에 달려온 사람들은 벌써 먼 발치에 서 있다. 약수 한 모금이 생명수처럼 느껴지고 이 생명수가 내 몸속에서 피와 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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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 풍경 ⓒ 김강임

윗세오름 '동능' 정상에는 아침을 미처 먹지 못하고 달려온 산악인들이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는 모습이다. 하늘을 향해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곳에 오면 모두 용서가 된다.

한라산 영실코스는 가장 짧은 코스로 유난히 산새가 아름답고 계절마다 풍기는 매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아끼는 산행코스다. 물론 해발 1700고지인 윗세오름까지만 등산이 가능한 아쉬움도 있지만, 편도 1시간 30분이면 올라갈 수 있고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경치가 뛰어난 데다가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 사람들은 한라산의 정기가 흐른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다시 하산해야 한다는 기억을 잊은 채 달려왔던 사람들에게 하산은 뒤돌아 온 길을 다시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익숙한 여행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내 발자취와 내가 짊어지고 왔던 무거운 짐을 다 풀어 놓고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힘들었던 삶의 곡절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곳. 그래서 산은 말이 없을까?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가 전설의 숲속처럼 보이고, 날마다 욕망과 허영으로 채웠던 내 가슴속을 텅 비워 갈 수 있게 만드는 산행은 내 마음의 거울이기도 하다. 힘들게 올라왔던 그 길은 또 누군가가 걷고 있다. 이들도 나만큼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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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입구 ⓒ 김강임

가다쉬고 가다쉬고 급경사의 돌계단을 하나 하나 밟는 사람들의 땀방울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일상도 이 돌계단만큼이나 가파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찡해진다.

벌써 해는 중천에 떠 있건만 밀려오는 차량 행렬과 등산객들의 발길로 한라산은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야 할 일상을 생각하며 차창문을 활짝 여니 뒤 늦게 핀 진달래와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울어대는 산새들의 합창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실 코스는 제주공항- 1100도로- 100고지- 어리목- 영실방향으로 가면 되고 시간은 왕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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