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비맞으면 감자농사 다 망치는데...

태풍이 몰고 올 폭우를 기다리는 농부의 저녁

등록 2003.06.19 00:37수정 2003.06.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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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밤이다. 골짜기를 메우며 울어대는 휘파람새도 오늘은 숨을 죽였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고요한 밤이다. 오늘이 음력 열아흐레니 평소 같으면 제법 둥근 달이 훤하게 떠오를 시간이다. 발그레한 백열등 하나가 개울 건너 이장네 쇠마구간에 켜져 있다. 어둠에 포위되어 외로운 모습이다. 그야말로 태풍 전야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 후배부부는 안녕하겠지.


눈을 가만히 감아본다. 풀벌레 소리가 윙윙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태초의 원음일까? 위잉~ 위잉~ 하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하다. 오옴 하는 우주음이런가? 이제 막 잠든 새들이의 가벼운 코고는 소리가 평화롭다.

낮에 툴툴대면서도 나를 따라 고추밭 풀도 뽑고 참외밭이랑 수박밭에 효소피막 작업을 한 새들이를 내려다본다. 아무리 봐도 내 자식 같지가 않다. 일하러 가자면 "아~이 아빠아아"하면서도 따라 나서는 아이다. 일단 따라 나섰다하면 아빠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보따리가 터지고 그게 여간 쏠쏠한 재미가 아님을 아는지라 고된 줄도 모르고 농사일을 잘 한다.

우리 면 농협에서 열린 친환경 농산물 특별강연. 실험실에서 배양된 미생물 발효촉진제를 선 보이는 강사.
우리 면 농협에서 열린 친환경 농산물 특별강연. 실험실에서 배양된 미생물 발효촉진제를 선 보이는 강사.전희식
태풍이 폭우를 몰고 온다는 일기예보에 이것부터 할까 저것부터 할까 아침부터 나는 정신이 없었다. 맞아. 이럴 때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해. 급한 것부터 하자. 하지만 이걸 먼저 하자니 저게 급한 것 같고 저걸 하자나 이게 급한 것 같았다.

전주대학교에서 개발하여 지난 달 소양농협 강당에서 두 시간 동안 특강 때 선보였던 이엠(EM) 액제를 꺼내려다 말고 나는 뒤안에 묻어 둔 독에서 호박효소를 한 바가지 퍼 왔다. 오늘 밤까지는 비가 안 오겠지. 그럼 충분해. 두 시간만 햇볕이 나면 되니까.

휴대용 분무기에다 호박효소를 부어넣고 오이 잎사귀에 뿜어 주었다. 진딧물이 어찌나 많은지 잎사귀가 남아나지를 않는다. 진딧물의 천적인 무당벌레가 살판 났다고 설쳐대도 역부족이다. 효소액은 진딧물 알에는 두꺼운 피막을 만들면서 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진딧물 애벌레에는 점도 높은 효소액이 몸에 달라붙으면서 몸이 오그라들게 하여 죽게 된다.

목초액은 예방제로 쓰이고 효소액은 진딧물 잡는 킬러다. 약하게 감식초를 타서 뿌려도 된다. 그러면 역시 진딧물 알이나 유충의 피부가 녹아버려 죽는다.


비가 오면 진딧물은 제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습기 찬 날씨에 번식이 왕성하다. 나는 진딧물을 우선 물리친 다음에 개선장군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다른 밭으로 향한다. 리어카에는 해야 될 모든 일의 모든 도구가 다 실렸다. 내려 보지도 못하고 그냥 되가져 올 도구들이 태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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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노릇한 들깨들이 깡마른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 새들이가 들깨 죽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함께 옮겨 심었던 콩은 전부다 말라 죽어 있었다. 들깨도 참깨 심었던 곳을 갈아엎고 심은 것이다.


두벌일 하자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 그 새 풀만 무성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우를 걱정하면서도 반기는 속내가 여기에 있다.

오늘이나 내일 비가 안 오면 지난 일요일에 100여 평 이상 심은 들깨들이 다 말라 죽는다. 도랑에서 물을 끌어다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달포 전에 참깨를 심었을 때도 연 사흘간 물을 끌어다 새들이와 밭 늦게까지 뿜어주었다. 그럼에도 가뭄에 콩 나듯 하고는 다 말라 죽었다. 까치가 다 잡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구입한 '풀밀어'는 체격에 따라 높낮이를 조절 할 수 있다. 간단한 구조인데 무척 편리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구입한 '풀밀어'는 체격에 따라 높낮이를 조절 할 수 있다. 간단한 구조인데 무척 편리하다.전희식
나는 역시 100평은 족히 될 콩밭 풀을 먼저 매기로 했다. 풀밀어와 딸깍이로 한번 밀어 준 곳이라 두벌매기는 훨씬 쉬웠다. 또 우리 밭 잡초는 아주 순하고 여리다.

유기농을 수 삼년 하다보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유기농 밭 잡초는 영 매가리가 없어진다. 손만 갖다대도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난다. 제초제를 한 방울도 안 먹고 자라다보니 잡초들이 독성이 없어져서 어떨 때는 눈만 흘겨도 비실비실해질 정도다.

쪼그린 채 오리걸음으로 콩 이랑을 타고 앉아 어기적어기적 풀을 맸다. 생강밭을 거쳐 감자밭에 가서는 나는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하늘을 봤다. 벌써 하루해가 진 지 오래고 어둑발이 지고 있다. 큰일이다.

저 풀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며칠 있다 베어 줄 요량을 하고 있었는데 감자 순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게 아닌가. 어디가 골이고 어디가 이랑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풀을 베어 준 지가 1주일도 안 될 것이다. 엊그제만 해도 풀이 손에 쥘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대로 비를 맞으면 올해 감자농사 망치는데. 벌써 앞이 잘 보이지 않게 어두워졌다. 다시 하늘을 봤다. 정적이 흐른다. 한 밤중에는 비가 쏟아질 분위기다. 아니다. 저런 하늘은 밍기적밍기적 비만 머금고 하루 이틀 간다.

됐다. 그럼 내일 이른 새벽에 하자. 새들아 가자. 집으로 가자. 참참참. 고추 좀 따자. 새들아 깻잎도 좀 따자. 쑥갓도 몇 줄기 잘랐다. 개울에서 고무신 발을 탈탈 씻고 벌컥대며 집으로 왔다.

숟가락 놓기가 바쁘게 곯아떨어질 것 같았는데 맨송맨송 머릿속이 하얗게 밝다. 문득 까맣게 어둔 밤보다도 내 삶이 더 어두워 보인다. 농담처럼 웃어넘겨 왔던 존재의 위기감이 와락 몰려온다. 상실의 저편에서 내가 손짓한다. 잠자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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