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싸움에서 의로운 싸움으로

방학중 자율학습에 반대하는 어느 담임 교사의 편지

등록 2003.07.11 17:13수정 2003.07.2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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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밤 늦도록 불이 켜진 순천S고.

밤 늦도록 불이 켜진 순천S고. ⓒ 오마이뉴스 조호진

오늘 아침에 배달된 주간 신문 <교육희망>에서 한 편의 시를 보았습니다. 도종환 님의 '종례시간'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시를 읽다가 저는 마음이 환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왜 그런 이중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은 문학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우리 교육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주는 나무들
한번씩 안아주고 가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해 주다 가거라

애들아 곧장 집으로 가
만질 수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공간에 빠져 있지 말고
구름이 하늘에다 그린 크고 넓은 화폭 옆에
너희가 좋아하는 짐승들도 그려넣고
바람이 해바라기에게 그러듯
과꽃 분꽃에 입맞추다 가거라

애들아 곧장 집으로 가 방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잘 자란 볏잎 머리칼도 쓰다듬다 가고

송사리 피라미 너희 발 간질이거든
너희도 개울물 허리에 간지럼먹다가 가거라
잠자리처럼 양팔 날개하여
고추밭에 노을지는 하늘쪽으로
날아가다 가거라.


어쩌면 이렇게 쉬운 언어로 교육에 대한 사유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이러한 찬탄으로 먼저 제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주고' '나무들 한 번씩 안아주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떠오르면서 한 겹 더 환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음이 슬퍼진 것은 그것이 시인의 바람일 뿐이라는 것, 현실의 화폭이 아닌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얻어진 그림이라는 것,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하는 아프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 바람이 얼마나 간절하고 깊었으면 상상력을 통해서나마 그런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을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문득 저를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오늘 아침 제 마음이 환해진, 그러다가 다시 쓸쓸해진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 제가 많이 아끼고 존경하는 후배교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편지의 주인공은 지난 여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 동천에서 이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벽화를 그리던 한 미술교사입니다. 얼굴만 보아도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게 만드는 참 좋은 선생님이지요.

박종선(37·순천 금당고) 교사는 올해 1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오랜만에 담임 배정을 받고 아이들에게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다가가 함께 올곧은 삶을 나누고자 했던 박 교사는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 나라 대다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불법적으로 강행하고 있는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의 횡포에서 박 교사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장맛비가 그치고 나면 곧 무더위가 시작되겠지요? 반 학생들을 처음 만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학기가 다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머지 않았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오직 대학입시만을 위한 공부로 아름다운 청소년기를 보내야 하는 학생들을 보며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요즘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여름방학 중 특기적성·자율학습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많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리고 선생님께 이해를 구하고자 용기를 내어 펜을 들었습니다.'

박 교사는 특히 여름방학을 앞두고 그 고민이 더욱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잠깐 쉬어가라고, 혹은 답답한 교실이 아닌 자연에서 더 큰 공부를 하라고 나라가 법령으로 정하여 만들어 준 방학을 빼앗긴 아이들. 박 교사는 그들에게 방학을 되찾아주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방학(放學)은 말의 뜻풀이로만 보면 기후조건으로 인해 학교를 잠시 휴업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학교 교육과는 또 다른 차원의 더 큰 공부를 자연과 사회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배움에 지친 학생들과 교사들이 다음 과정의 학습을 준비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기력을 재충전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학교는 학생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공간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정신과 몸으로 살아갑니다. 학교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의 도덕적 품성을 길러주고 몸이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정직해야 합니다. 또한, 교육 철학이나 소신이 없이 다른 학교가 하는데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변명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박 교사는 이런 소신 없는 현실론에 당당하게 맞선 것입니다.

'학생들의 자유의사를 무시한 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여름방학중 자율학습 실시 관행은 고쳐져야 합니다. (중등 81100-360<2002. 02.07> *2003년부터는 일체의 자율학습 지도비 징수 불가) 이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신체를 구속하는 잘못된 처사이므로 본교 1학년 7반 담임과 학생들은 이런 잘못된 관행과 부당한 지시에 더 이상 따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박 선생님의 편지를 읽고 저는 '결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가 저의 마음을 환하게도 하고 슬프게도 했습니다. 방학 중 자율학습은 희망자에 한하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율학습을 희망하지 않은 아이들을 그들의 의사대로 해주려는 것뿐인데 왜 결단이 필요한 것인지. 무더운 여름날 답답한 교실 공간에 강제로 남아 오후 6시(3학년은 밤 10시)까지 공부를 강요받는 것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장소에서 자기학습 계획에 의해 공부를 하겠다는 기특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학교는 이미 인권의 사각지대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더욱 불행한 일은 미래의 기둥이 될 아이들이 거기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귀를 막는 교육은 노예교육에 다름 아닙니다. 생의 아름다운 동기가 거세된, 강제에 길들여진 영혼이 없는 아이들이 성적과 돈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허위가 아니면 무지의 소치입니다.

편지글에 등장하는 교장 선생님의 '다른 학교가 다 하는데 우리만 안 할 수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학교에서 다 하는데 안 하게 되면 아마도 일부 학부형님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지요. 문제는 교장선생님의 이런 현실론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교육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교육현장에서는 '성적 부풀리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도덕 과목 시험을 본다면 미리 3배수 정도의 예상문제를 나누어주고 시험지를 달달 외우게 하는 학교가 많습니다. 그 결과 성적이 중하위권인 학생도 평균 90점이 넘어 '수'를 받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것을 절대평가가 가져온 폐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일이 교육현장에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자행되어 우리의 교육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은 '다른 학교도 다 그런데 우리 학교만 원칙을 지키면 손해본다'는 이른바 현실론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교육부가 발벗고 나서고 있지만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전국이나 지역 단위의 교장단회의에서 이런 현안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는 자리가 만들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 바로 교장 선생님들이 아니겠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솔직히 지금의 교장단회의에 그런 기대를 거는 자체가 현실을 모르는 일종의 넌센스입니다. 그만큼 교육철학이나 소신을 가진 교장선생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교사인 박 교사가 나선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현실론에 맥을 못 추는 대다수 교사들의 침묵과 동조 속에서 의로운 싸움이 외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교사로서 박 선생님의 아름다운 결단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학교가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책임하고 소신 없는 현실론에 맞서서 학교의 주인인 아이들을 위한 진정한 교육적 대안을 고민하고 그것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훌륭하신 교장 선생님과 당당한 평교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뜻 있는 학부형님들의 성원과 동참도 기대해봅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직무를 유기한 교육관청의 반성과 함께 일선 학교에 대한 엄중한 감시와 지도도 부탁드립니다. 박 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편지의 전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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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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