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닷가에서 울려퍼지던 하모니카 소리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3>밤바다

등록 2003.08.18 16:31수정 2003.08.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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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 가족들이 2박3일 동안 여름휴가를 보냈던 바닷가

우리 가족들이 2박3일 동안 여름휴가를 보냈던 바닷가 ⓒ 이종찬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파도 위에 물거품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못 잊을 그대여

저 하늘 끝까지 저 바다 끝까지
단 둘이 가자던 파란 꿈은 사라지고

우우우 우우우우우우

바람이 불면 행여나 그 님인가
살며시 돌아서면 쓸쓸한 파도소리

(김희갑 작사,작곡. 키보이스 노래. '바닷가의 추억' 모두)



"감포로 넘어가는 길이 완전히 S잔데 갈 수 있겠나?"
"체! 창원에서 경주까지 2시간 만에 달려온 마누라의 운전실력을 그렇게 못 믿겠단 말이야. 정 미덥잖으면 혼자 버스 타고 오든지."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덕동호에서 추령터널로 넘어가는 길이 그만큼 힘든 길이라는 그 말이지."

지지난 주 화요일 오후 5시경, 창원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과 처제 가족을 포함, 모두 6명이 아내의 차를 타고 내 일터가 있는 경주로 왔다. 일요일도 없이 늘상 백화점에 나가던 아내가 모처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2박3일 동안의 짧은 여름휴가를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왜냐하면 그 앞날, 내가 감포 바닷가 근처에 민박집을 구하러 나갔다가 비가 오는 관계로 그냥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마도 감포에 도착하면 오후 6시쯤 될 것이다. 그 시간에 바닷가를 낀 깨끗한 민박집이 있으려나?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일이어서 약간의 안도감도 들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는 이내 덕동호를 끼고 뱀처럼 꾸불거리는 S자 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평소에 운전을 오래한 사람들도 운전연습을 다시 하는 길이라는 소문이 날 만치 심하게 꼬부라진 길이었다. 게다가 도로가 2차선이어서 차가 한번 막혔다 하면 오도 가도 못하는 그런 길이었다.

하지만 평일이어서 그런지 차가 별로 없었다. 아내 또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능숙하게 운전을 잘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이윽고 S자로 굽어진 추령터널을 지나, 기림사와 골굴암 가는 길을 뒤로 한 채 전촌해수욕장에 닿았다. 하지만 전촌해수욕장은 곳곳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어 몹시 지저분하게 보였다.

"감포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 여기는 민박집과 해수욕장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이들 놀기에 불편해."
"아빠! 배 고푸다아."
"이모부! 어디까지 가요?"
"너희들 수영하기 좋은 바닷가로 가려고 하니까 조금만 더 참아?"

a 끝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끝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 이종찬

감포 쪽에도 마땅한 바닷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차를 돌려 이번에는 감은사지와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바닷가와 백사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이 2박 3일 동안 있을 만한 마땅한 민박집이 보이지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내와 두 딸, 처제와 소영이, 준형이까지도 저어기 불안한 눈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있는 경주까지 모처럼 여름휴가를 온 가족들이 좀 더 멋지고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머물게 하고 싶었다.

"이러다가 밤새도록 이렇게 헤매는 건 아냐?"
"아니, 다시 전촌해수욕장 쪽으로 올라가 보자."
"또 지난 해처럼 허름한 민박집에다 우리를 내팽개치려는 건 아니겠지. 방이 없다는 핑계로?"

날은 이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몹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까 오는 길에 언뜻 눈에 띈 바닷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바닷가 바로 앞에는 제법 깔끔하게 보이는 모텔이 두 개나 있었다. 그 바닷가는 예전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에게도 개방이 되어 있는, 인적이 드문 그런 바닷가였다.

"얼마래?"
"특실 하나에 6만원이래. 말만 잘하면 조금 깎을 수 있을 것도 같던데?"
"저 쪽은?"
"그 쪽도 6만원인데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그으래.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흥정을 한번 해 보지."

그 모텔은 예상 외로 방이 많이 비어 있었다. 내가 왜 이리도 방이 많이 비어 있냐고 묻자 요즈음에는 비가 자주 온 데다, 오늘은 평일이어서 더욱 그렇다고 했다. 유리잔에 뽀오얀 습기가 낀 냉수를 한 잔 권하는 주인의 표정이 서글서글한 게 마음에 꼭 들었다.

"큰 방 하나에 얼마죠?"
"6만원인데, 특실로 드릴께예. 특실에는 베란다까지 있니더."
"나도 경주 사는데, 제 체면을 봐서라도 조금만 깎읍시다. 만원만 깎으면 안 되겠습니까?"
"… 그라이소 고마. 그 방 그거 주말에는 12만원씩 받는 방이니더."
"고맙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밤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비로소 그 모텔 특실을 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더 문제였다. 우리 가족들이 2박 3일 동안 먹을 양식이 담긴 여러 가지 짐들을 옯겨야만 했다. 물론 아이스박스 등 무거운 짐들은 평소에도 땀이 많은 내 차지였다.

a 파도에 휘쓸려 자갈밭으로 튕겨져 나온 빛나

파도에 휘쓸려 자갈밭으로 튕겨져 나온 빛나 ⓒ 이종찬

"아이들 배 고프겠다. 빨리 빨리 준비하자."
"아빠! 안 씻어?"
"밥 먹고 나서."
"아빠! 밥 먹고 나서 바닷가에 나가자."
"그래, 그래."
"아싸! 아싸!"
"참 빛나는 하모니커 가지고 왔지?"
"그으럼."

그날 밤, 삼겹살을 안주와 반찬으로 삼아 소주 한 병과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운 나는 푸름이와 빛나, 그리고 소영이와 준형이를 데리고 파도소리가 요란한 검은 빛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고운 자갈이 깔린 그 바닷가에 앉아 정말 오랜만에 하모니커를 불었다.

푸름이와 빛나, 소영이와 준형이도 내가 부르는 하모니커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하모니커 소리와 허연 갈기를 세우며 끝없이 달려와 자갈에 스러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 그래. 일 년 내내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무슨 시름이나 걱정 따위가 있겠는가.

"아빠! 바다에서 해가 뜨고 있어."
"으응? 어디 어디?"
"저어기~"
"날씨가 맑았으면 바닷물을 검붉게 펄펄 끓이며 떠오르는 멋진 일출을 볼 수가 있었을 텐데, 아깝구나."
"빨랑 나가서 수영하자!"

날이 밝기가 무섭게 푸름이와 빛나, 소영이와 준형이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다. 아내와 처제도 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오늘 아침식사는 바닷가에서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한 뒤 따라 나오겠다며. 그래. 나 또한 어서 나가 바닷물에 몸을 풍덩 담그고 싶었다.

"아빠! 바닷물이 안 차가워?"
"응. 괜찮아. 어서 들어와."
"아빠! 너무 깊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
"그래. 걱정 마."

그렇게 시작된 수영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 또한 식사를 하는 시간을 빼고는 진종일 아이들과 함께 파도타기를 했다. 특히나 그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좋았다. 또한 매끈하면서도 자잘한 자갈이 깔려 있어 모래가 들러붙지 않아 아이들이 놀기에 더없이 좋았다.

파도에 싸르륵 싸르륵 쓸려내리는 자갈소리와 가끔 울어대는 갈매기 소리도 참으로 듣기 좋았다. 하지만 아내와 처제는 바닷물에 발만 조금 적신 채 내내 파라솔에 누워 나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들이 파도타기를 하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저 뿌듯한 모양이었다.

a 파라솔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큰딸 푸름이

파라솔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큰딸 푸름이 ⓒ 이종찬

"아빠! 하루만 더 놀다 가면 안 돼?"
"엄마 휴가가 내일까지잖아.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경주 나들이를 해야지. 불국사에 가서 다보탑과 석가탑도 보고, 분황사 모전석탑, 황룡사터, 안압지, 반월성, 석빙고, 에밀레종 등도 봐야지."
"그래도…."

그랬다. 다음 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서둘러 경주기행에 나섰다. 그리고 석굴암부터 시작해서 첨성대까지 경주 시내에 있는 주요한 문화유적은 거의 다 살펴 보았다.

그래. <경주에서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여행기사를 일주일에 두 꼭지씩 쓰는 나로서는 그 두 딸을 데리고 다시 둘러보는 경주의 문화유적들은 정말 새삼스럽게 다가왔었다.

이제 여름휴가도 끝이 났다. 나와 우리 가족들 모두도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 검은 빛 바다 위에서 울려퍼지던 하모니카 소리…. 화음을 맞추듯이 쏴아 쏴아 들려오던 파도소리…. 아이들의 해맑은 노랫소리…. 그래. 그 소리는 오늘도 우리 가족들 가슴 깊숙히 울려퍼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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